고향과 봄의 노래 봄이 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 가운데 하나가 <고향의 봄>이다. 그리고 ‘고향’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노래도 <고향의 봄>이 으뜸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향의 봄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이 노래는 시인 이원수(1911-1981)의 동시 ‘고향의 봄’에 홍난파(1897~1941) 선생이 곡을 붙인 것이다. 이원수 선생이 경남 마산에서 살던 14-5세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마산에서 소년회 활동을 하던 이원수는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인 소파 방정환 선생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소파 선생이 발행하던 잡지 <어린이>에 원고를 보냈다. 그중 <고향의 봄>이 이듬해인 1926년 4월호에 입선(은메달을 상으로 받음)되어 실리면서 그의 이름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이원수 선생이 1911년생이니까 잡지에 실릴 때의 나이는 15세이다. 그러다가 1929년에 홍난파(1897~1941)가 지금의 곡을 붙인 후부터 전국적으로 널리 불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대표적인 봄노래이며 동요이지만 성인들의 합창곡으로도 많이 불린다. 소프라노 조수미가 미국 카네기 홀에서 감칠 맛나게 부른 <고향의 봄>도 있다. 이원수가 고향 창원을 그리며 쓴 동시 이원수가 <고향의 봄> 원고를 쓴 곳은 마산이다. 그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창원을 ‘고향’이라고 생각하며 이 시를 썼다. 이원수는 1980년 월간 <소년> 잡지에 실은 <자전 회고록, 흘러가는 세월 속에>라는 제목의 글에서 자신이 <고향의 봄>을 쓴 소년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자란 고향은 경남 창원읍이다. 나는 그 조그만 읍에서 아홉살까지 살았다. 큰 고목의 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의 진달래와 철쭉꽃이 어우러져 피고 마을집 돌담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 살구꽃도 아름다웠다. 동문밖에 있는 미나리 논, 개울을 따라 내려가면 피라미가 노는 곳이 있어서 나는 그 피라미로 미끼를 삼아 물가에 날라오는 파랑새를 잡으려고 애쓰던 일이 생각난다. 봄이 되면 남쪽 들판에 물결치는 푸르고 윤기나는 보리밭, 봄바람에 흐느적이며 춤추는 길가의 수양버들. 그러던 내가 아홉살 되던 해 가을 아버지의 벌이가 잘 안되어 생활이 너무 궁했으므로 한 40리 거리가 되는 진명이란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여태가지의 나의 세계였던 조그마한 우리집 -그 이웃의 동무아이, 정든 동문 밖 개울들을 버리고 떠나는 마음은 슬픈 것 같기도 했다. 이삿짐을 실은 수레가 떠나고 우리도 집을 나올 때, 나는 뜰에 줄지어 심은 키 작은 국화꽃들 -철이 지나 꽃의 빛깔마저 변해가는 그 국화꽃들이 초라하게 혼자 남는 걸 처량하게 생각했다. 찬 바람 부는 길을 걸어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다리가 와들와들 떨리는 걸 느꼈다. 그건 늦가을 추위 때문이라기보다는 알지 못하는 곳으로 처음 타는 기차를 타고 갈 호기심과 무언지 모를 두려움에서였던 것 같다. 진영에서의 1년은 외로운 나날이었다. 이웃에 같은 또래의 동무가 없었고, 다니는 서당에도 정이 들지 않았었다. 그러다 우리 집은 진영을 떠나 마산으로 옮겨 온 것이다. 마산은 바다와 산이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고향의 봄>이 발표된 후로 나는 동요짓기에 열심이었다. 이렇게 편지를 주고 받던 낯모르는 친구들 가운데 자신보다 먼저 <오빠생각>이란 시가 <어린이> 잡지에 실렸던 최순애란 여학생이 있었다. (‘고향의 봄’ 2편에 계속)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