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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과 봄의 노래 <고향의 봄>: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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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과 봄의 노래 <고향의 봄>

이원수의 <고향의 봄>과 최순애의 <오빠생각> (1)

이정식 / 언론인 | 기사입력 2014/04/20 [17:23]

고향과 봄의 노래 <고향의 봄>

이원수의 <고향의 봄>과 최순애의 <오빠생각> (1)

이정식 / 언론인 | 입력 : 2014/04/20 [17:23]
▲ 이원수-최순애 부부 (1980년 문화의 날 대한민국 문학상을 받은 후 기념 촬영)

고향과 봄의 노래

봄이 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 가운데 하나가 <고향의 봄>이다. 그리고 ‘고향’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노래도 <고향의 봄>이 으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처럼 <고향의 봄>은 봄의 노래지만, 또한 고향을 그리는 모든 이들의 노래이다. 남북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많지 않은 노래 중 하나이다. 남북 분단 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고향의 봄
이원수 작시 홍난파 작곡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 노래는 시인 이원수(1911-1981)의 동시 ‘고향의 봄’에 홍난파(1897~1941) 선생이 곡을 붙인 것이다. 이원수 선생이 경남 마산에서 살던 14-5세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마산에서 소년회 활동을 하던 이원수는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인 소파 방정환 선생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소파 선생이 발행하던 잡지 <어린이>에 원고를 보냈다. 그중 <고향의 봄>이 이듬해인 1926년 4월호에 입선(은메달을 상으로 받음)되어 실리면서 그의 이름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이원수 선생이 1911년생이니까 잡지에 실릴 때의 나이는 15세이다.
<고향의 봄>에 처음 곡을 붙인 이는 초등학교 교사였던 동요작곡가 이일래(1903~1979)다. 이일래는 동요 <산토끼>의 작사 작곡자로 잘 알려진 분. 그러나 이일래의 <고향의 봄>은 당시 마산 등 일부에서만 불렸다.

▲ 작곡가 홍난파

그러다가 1929년에 홍난파(1897~1941)가 지금의 곡을 붙인 후부터 전국적으로 널리 불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대표적인 봄노래이며 동요이지만 성인들의 합창곡으로도 많이 불린다. 소프라노 조수미가 미국 카네기 홀에서 감칠 맛나게 부른 <고향의 봄>도 있다.
이원수 선생의 부인은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로 시작되는 유명한 동요 <오빠생각>의 작사자인 최순애(1914-1998)다. 이 역시 최순애가 11살 어린 소녀 시절에 쓴 동시다. 방정환이 펴내던 <어린이>에 최순애의 <오빠생각>이 실린 것은 <고향의 봄> 보다 다섯달 먼저인 1925년 11월이었다. 세 살 차이였던 두 사람은 <어린이> 잡지를 통해 알게 되어 결혼에 이르게 된다. <오빠생각>도 홍난파가 <고향의 봄>과 같은 해인 1929년에 곡을 붙였다. [주: <오빠생각>에는 박태준(1900~1986)도 곡을 붙였는데 박태준의 <오빠생각>이 더 널리 불려지고 있다.]

이원수가 고향 창원을 그리며 쓴 동시

이원수가 <고향의 봄> 원고를 쓴 곳은 마산이다. 그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창원을 ‘고향’이라고 생각하며 이 시를 썼다. 이원수는 1980년 월간 <소년> 잡지에 실은 <자전 회고록, 흘러가는 세월 속에>라는 제목의 글에서 자신이 <고향의 봄>을 쓴 소년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자란 고향은 경남 창원읍이다. 나는 그 조그만 읍에서 아홉살까지 살았다.
그러나 내가 난 곳은 양산이라고 했다. 양산서 나긴 했지만 1년도 못되어 창원으로 이사해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난 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있는 소답리라는 마을의 서당엘 다녔다.
소답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오래 되고 큰 기와집의 부잣집들이 있었다.

큰 고목의 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의 진달래와 철쭉꽃이 어우러져 피고 마을집 돌담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 살구꽃도 아름다웠다.
나는 이 마을 서당엘 다니며 <동몽선습> <통감> <연주시> 등 한문책을 배웠다. <천자문>은 집에서 아버지가 미리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었다.
집에서 가까운 동문은 석벽이 남아 있었고, 성문은 없었지만 성문을 드나드는 기분으로 다녔다.

동문밖에 있는 미나리 논, 개울을 따라 내려가면 피라미가 노는 곳이 있어서 나는 그 피라미로 미끼를 삼아 물가에 날라오는 파랑새를 잡으려고 애쓰던 일이 생각난다. 봄이 되면 남쪽 들판에 물결치는 푸르고 윤기나는 보리밭, 봄바람에 흐느적이며 춤추는 길가의 수양버들.

그러던 내가 아홉살 되던 해 가을 아버지의 벌이가 잘 안되어 생활이 너무 궁했으므로 한 40리 거리가 되는 진명이란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여태가지의 나의 세계였던 조그마한 우리집 -그 이웃의 동무아이, 정든 동문 밖 개울들을 버리고 떠나는 마음은 슬픈 것 같기도 했다.

이삿짐을 실은 수레가 떠나고 우리도 집을 나올 때, 나는 뜰에 줄지어 심은 키 작은 국화꽃들 -철이 지나 꽃의 빛깔마저 변해가는 그 국화꽃들이 초라하게 혼자 남는 걸 처량하게 생각했다. 찬 바람 부는 길을 걸어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다리가 와들와들 떨리는 걸 느꼈다. 그건 늦가을 추위 때문이라기보다는 알지 못하는 곳으로 처음 타는 기차를 타고 갈 호기심과 무언지 모를 두려움에서였던 것 같다.

진영에서의 1년은 외로운 나날이었다. 이웃에 같은 또래의 동무가 없었고, 다니는 서당에도 정이 들지 않았었다. 그러다 우리 집은 진영을 떠나 마산으로 옮겨 온 것이다.
나는 열살의 소년으로 마산서 비로소 학교에 입학을 했다. 서당의 한문 공부와 다른 보통학교(초등학교)의 교과서는 쉽고 재미있었다. 처음으로 일본글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고 작문을 했다. 나는 그림과 글짓기에서 항상 우등이었다.

마산은 바다와 산이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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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요 <고향의 봄>은 곧 이일래라는 분의 작곡으로 마산의 사립학교에서 많이 불리기 시작했다.
이일래 선생은 그 때 마산에 있는 창신학교 선생이셨다.
뒤에 <산토끼>라는 동요도 그 분의 작사 작곡으로 되었었는데 1979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고향의 봄이 발표된 지) 2~3년 후 홍난파 선생도 <고향의 봄>을 지어 (노래가)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고향의 봄>이 발표된 후로 나는 동요짓기에 열심이었다.
어린이 잡지에는 계속 작품을 보내어 자주 발표되었고, 일간 신문에도 부지런히 발표를 했다.
동요로 해서 나는 전국 각 지방에 얼굴을 보지 못한 친구들을 가지게 되었다. 서울, 대구, 원산, 진주, 함경도의 이원, 수원, 유천 등지에 있는 동요쓰기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사귀어 편지 왕래가 잦았다.

(월간 소년, 1980년 10월호)

▲ 창원 용지공원의 <고향의 봄> 노래비 앞에서 어린이들이 놀고 있다.

이렇게 편지를 주고 받던 낯모르는 친구들 가운데 자신보다 먼저 <오빠생각>이란 시가 <어린이> 잡지에 실렸던 최순애란 여학생이 있었다. (‘고향의 봄’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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