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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외면했던 당시 천주교 주교: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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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외면했던 당시 천주교 주교

하얼빈의 안중근 (10)

이정식 | 기사입력 2014/04/11 [17:42]

안중근 외면했던 당시 천주교 주교

하얼빈의 안중근 (10)

이정식 | 입력 : 2014/04/11 [17:42]

안 의사는 유서에서 큰 아들이 신부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조선 천주교의 수장인 프랑스인 뮈텔 주교는 

안 의사가 천주교인이 아니라고 부인하기도

▲ 빌렘 신부(홍 신부, 가운데 뒷 모습만 보이는 이)의 안중근 의사 면회. 정근, 공근 두 동생과 같이 했다. ((1910.3.8)

안중근 의사의 옥중 자서전 <안응칠 역사>의 마지막 부분은 <동양평화론> 저술을 마칠 때까지 사형집행을 한 달 남짓 늦춰달라고 법원장에게 요청을 하여 허락을 받았다는 내용과 법원과 감옥소의 관리들이 안 의사의 필적을 받기 위해 종이와 비단 수 백장을 사 넣는 바람에 매일 몇 시간씩 글씨를 썼다는 내용에 이어 한국에서 면회 온 빌렘 신부(한국명 홍석구, 1860~1938)를 만났다 헤어지는 것으로 다음과 같이 마무리 하고 있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 특별히 친한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장 아오끼요, 다른 한 사람은 간수 타나까였다.
아오끼는 성질이 어질고 공평하고, 타나카는 우리말에 능통하여 나를 진심으로 돌아보아 주었기에 두 사람과는 정이 들어 서로 형제와 같았다.
그때 홍 신부(빌렘 신부)가 나의 영생 영락하는 성사를 해주기 위해서, 이곳에 와서 면회하니 꿈과 같이 기쁨을 이를 길이 없었다.
그는 본시 프랑스 사람으로서 파리에서 동양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한 뒤에 사제서품을 받아 신부가 된 사람이었다.
그는 재주가 출중해서 학문을 많이 하고 영어, 불어, 독일어 그리고 로마 고대어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1890년쯤에 한국에 파송되어 경성과 인천에서 몇 해를 살았고, 그 뒤 1895, 6년쯤에 다시 황해도에 와서 전교할 적에 내가 영세를 받고, 그 뒤에도 오랫동안 같이 있었다. 오늘 이곳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의 나이 53세였다. (나이는 다소 착오가 있는 듯하다)
그때 홍 신부는 내게 성서의 도리를 가지고 강론한 뒤에 고해 성사를 주고, 이튿날 아침 미사 성세 대례를 거행하고, 성체 성사로 천주의 특별한 은혜를 받으니, 감사하기 이를 길 없었다. 이때 감옥소에 있는 일반 관리들이 모두 와서 참례했었다. 그 이튿날 오후 2시쯤에 또 와서 내게 말하기를,
“오늘 대한국으로 돌아가기에 작별차 왔다.”
하고, 서로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에 손잡고 작별하며 내게 말하였다.
“인자하신 천주께서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거두어 주실 것이니 마음의 평화를 가지라.”
하며 손을 들어 나를 향해서 강복한 뒤 떠나가니, 때는 1910년 경술 음력 2월 초하루 오후 2시쯤이었다.
이상은 안중근의 32년 동안의 역사의 대강이다.

1910년 경술 음력 2월 초 5일 (양력 3월 15일)
뤼순 옥중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쓰다

 

▲ 빌렘 신부

그만큼 그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고, 또 마지막 가는 길에 신앙에 의지함이 컸다고도 할 수 있다.
안 의사가 어머니와 아내에게 보낸 유서에도 천주교인 안 의사의 깊은 신앙이 잘 나타나있다. 큰 아들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해달라고 써있다.

어머니 전상서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니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을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 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있으니 마음을 편안히 하옵기를 천만번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기를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옵시고 천주에 바치도록 키워 주십시오.
이상이 대요이며, 그 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온 뒤 누누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위아래 여러분께 문안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 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아들 도마 올림

안 의사는 순국 하루전인 3월 25일 정근, 공근 두 동생을 마지막으로 면회하는 자리에서 이러한 유서를 뮈텔 주교(한국명 민덕효, 1854~1933, 1890~1932까지 교구장으로 재직)와 빌렘 신부 등에게 쓴 편지와 함께 전했다.

친일적 분위기였던 당시의 천주교

안 의사가 고국에서 자신을 면회 온 빌렘 신부 뿐 아니라 뮈텔 주교에게까지 편지를 썼다는 것은 안 의사와 뮈텔 주교가 면식 이상의 관계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뮈텔 주교는 사실 안 의사를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뮈텔 주교는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 직후 자신은 안 의사를 알지 못하며, 그는 천주교인이 아니라고 했다.

왜 그랬을까?
당시 구한말 조선 천주교의 수장이었던 프랑스인 뮈텔 주교는 매우 친일적이었다는 것이 대다수 역사학자들의 견해다. 천주교의 분위기가 그랬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 프랑스와 일본이 긴밀한 협조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뮈텔 주교는, 과거 안중근 의사에게 세례를 주었으며(1897년 안중근이 19세 때) 안중근 일가가 살고 있는 황해도 청계동 본당을 맡고 있는 빌렘 신부가 안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성사를 집행하기 위해 뤼순에 가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910년 2월 21일, 안 의사의 사촌동생 안명근이 뮈텔을 찾아가 부탁했지만 이 역시 거절했다.
결국 빌렘 신부는 허락을 받지 못한 채 뮈텔 주교에게 뤼순으로 간다는 서한을 보내고는 3월 2일 출발했다.

반면에 뮈텔 주교 자신은 안 의사 하얼빈 의거 며칠 후인 1909년 11월 4일 서울의 일본 헌병 본부에서 거행된 이토의 장례식에 선교사 3명를 데리고 갔다. 장례행사가 일본 신도 예식이어서 직접 참석은 하지 않았으나 ‘조선천주교회’라고 쓴 조화를 장례식장에 전시해 놓게 했다.
빌렘 신부가 뤼순에서 돌아왔을 때는 ‘명령에 불복하고 정치적 문제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2개월간 미사집전을 금하는 징계조치를 했다
빌렘 신부는 그뒤 결국 뮈텔 주교와 다른 사제들의 미움을 받아 1914년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실상 더 큰 문제는 그 사이에 발생했다.
뮈텔 주교가 빌렘 신부에게 안중근 가족들의 움직임을 보고하도록 명령한 일이다. 이는 사실상 밀정 노릇을 시킨 셈이 되었는데 이로써 엄청난 일이 터지게 된다. 민족지도자들이 대대적으로 체포된 ‘105인 사건’이 그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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