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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응칠 역사>가 발견되기 까지: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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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응칠 역사>가 발견되기 까지

하얼빈의 안중근 (3)

이정식 | 기사입력 2014/03/17 [09:30]

<안응칠 역사>가 발견되기 까지

하얼빈의 안중근 (3)

이정식 | 입력 : 2014/03/17 [09:30]
▲ 남산 안중근 기념관에 있는 안 의사 좌상. 뒤에 걸린 '대한 독립' 혈서는 1909년 안의사와 '단지동맹' 동지들이 절단한 손가락에서 나온 피로 쓴 것을 확대한 것.

이상의 이야기는 <안응칠 역사>에 대부분 나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일제가 꼭꼭 숨겼다는 <안응칠 역사>는 어떻게 거의 60년이나 지나서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을까? 최서면 원장은 일본어로 번역된 프린트 본을 어떻게 입수했을까?
프린트 본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저격하고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어 일본 헌병에게 넘겨지는데서 끝나는데 처음에는 그것이 전부인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후 한문으로 된 전문이 발견되어 옥중 생활까지가 담긴 전체의 내용을 알게되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먼저 1979년 원문을 한글로 바꾸어 <안중근 의사 자서전>으로 발행했을 때 노산 이은상 선생이 쓴 발간사를 읽어본 후 최서면 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순서일 듯 하다.

다음은 노산 선생이 1979년 10월 1일 자로 쓴 <안중근 의사 자서전>의 '발간사'이다.

이번 발간하는 안중근의사 자선전은 의사가 쓴 ⌜안응칠 역사⌟란 제목의 글을 한글로 국역한 것이다.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상오 9시 반, 하얼빈역에서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뤼순 감옥에 수감되어 계시던 동안, 그 해 12월 13일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1910년 순국하기 10일 전인 3월 15일에 탈고한 것이므로 무릇 93일 동안 집필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그 원고가 세상에 나타날리 없었고, 해방 후에도 그 원고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1969년 겨울 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에 의하여 일본어 프린트본이 발견되어 그것을 한글로 번역, 간행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원본이 아니고 일본어로 번역된 후, 다시 우리글로 거듭 번역하는 동안, 글 속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다. 그로 인해 우리는 원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고 또 반드시 나타나리라 믿고 있던 차에 일본에서 한문으로 된 원본이 발견되었다.

나가사키 시에 거주하는 와타나베 쇼시로 씨가 1978년 우리에게 기증해 주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안 의사의 친필 원본이 아니고 한문으로 된 의사의 초고본을 버낀 것으로 일본어 프린트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번에 발견된 한문본과 일본어 프린트본을 비교해 본 바 일본어 번역본에는 누락된 부분과 오역된 곳이 상당히 많았다. 아마 친필 원본은 의사가 옥중에서 집필했다는 ⌜동양평화론⌟ 등과 함께 일제의 비밀문서고에 보관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의사의 옥중자선전이 비록 친필 원본은 아닐지언정 원문을 그대로 베낀 것이기에 이것이나마 세상에 알려져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그 글을 국역하여 1979년 9월 2일 안중근의사 탄신 100주년 기념일을 계기로 발간한 바 있었다. 그 내용은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하고 러시아 군인에게 체포되어 일본 헌병에게 넘겨진 데서 끝나고 그 이후는 생략한다고 되어 있어 그렇게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1979년 기념행사가 있던 바로 그날 일본에서 김정명 교수가 <안응칠 역사>의 전문을 일본에서 발견하고 등사본을 보내와 검토해 보았더니 생략되었던 부분이 모두 들어 있어 그 끝 부분을 번역하여 이를 추가하여 다시 발간하는 바이다. 노산 이은상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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