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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과 단지동맹: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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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과 단지동맹

하얼빈 안중근 (2)

이정식 | 기사입력 2014/03/16 [16:46]

안중근과 단지동맹

하얼빈 안중근 (2)

이정식 | 입력 : 2014/03/16 [16:46]

 안중근은 29세 때인 1908년 6월,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의병들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에 도착해 일본군과 2회에 걸쳐 전투를 벌였다.

첫번 전투에서 의병들은 일본군 4명을 포로로 잡아 기세를 올렸다. 안중근은, 의병들에게 죽임을 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일본군 포로들이 눈물을 흘리며 이토 히로부미를 원망하고 이국 땅에서 죽게됨을 한탄하므로 부하장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들을 살려보냈다. 포로의 처우에 관한 만국공법에 따른다는 대의에서였다.

그 뒤 의병들은 일본군과의 두번째 전투에서 패해 뿔뿔이 흩어졌으며 안중근은 부하 2명을 데리고 천신만고 끝에 두만강을 건넜다. 때는 장마철이었으나 출전한 뒤 한달 반 동안 집안에서 잔 일이 없었고, 마지막 두만강을 건너기까지 12일 동안은 겨우 두끼를 먹었을 뿐이었다.

‘안응칠 역사’에 의하면 러시아 영토인 연추(烟秋, 노보키에프스크)에 이르렀을 때 피골이 상접하여 친구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 단지한 안중근 의사의 왼손

안 의사는 연추에서 1909년 3월 2일, 김기용 등 동지 11명과 12명으로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몸을 바치겠다는 징표로 왼손 약지 세 번째 마디를 절단키로 한 것이다.
안 의사는 <안응칠 역사>에서 단지동맹에 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 이듬해(1909년) 연추에 돌아와, 동지 12인과 같이 상의하기를,
‘우리들이 이제까지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요, 뿐만아니라 강력한 조직이 없으면 어떤 일도 달성하기가 어려울 것인즉, 오늘 우리들은 손가락을 끊어 맹서를 같이 하고 증거를 보인 다음,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기어이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소.’
하자, 모두가 그대로 따르겠다 하여, 마침내 열두 사람이 각각 왼 손가락을 끊어, 그 피로써 태극기에 글자 넉자를 크게 쓰니 ‘대한독립(大韓獨立)’이었다. 쓰기를 마치고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다음 하늘과 땅에 맹서하고 흩어졌다.
그 뒤에 여러 곳을 왕래하며 교육에 힘쓰고 국민의 뜻을 모으고 신문을 구독하는 것을 일을 삼았다.“
그러던 중 이해(1909년) 9월, 마음이 울적하고 초조하여 블라디보스톡에 갔다가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 올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신문을 보았더니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라는 것이 참말이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안 의사는 마음 속으로 “소원하던 일을 이제야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하며 기뻐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온다는 소문은 아직 정확치 않은 말이요, 하얼빈에 가 본 후에야 일의 성공여부가 결정될 것이라 생각하고 곧 떠나고 싶었으나 활동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궁리 끝에 이곳에 사는 황해도 의병장 이석산을 찾아갔다.
그때 이 씨는 외출하려고 문을 나서는 참이라, 그에게 돈 백원만 꾸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지 않았다. 일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어찌할 길이 없어, 위협하고 백 원을 강제로 빼앗아 돌아오니 일이 반이나 이루어진 것 같았다.“

안 의사는 <안응칠 역사>에서 ‘위협하고 돈을 강제로 빼앗았다’고 했는데 어떻게 위협한 것일까? 이때의 상황에 대해 일본 미야자기현의 대림사 주지인 사이토 타이겐씨가 지은 <내 마음의 안중근>은 -사실여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안중근은 고심 끝에 블라디보스톡에 사는 의병장 이석산을 찾아가 백 원을 제공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그는 주저했다. 이쩔 수 없이 안중근은 권총을 들이대고 위협하여 백 원을 받아냈다.
“나라의 위급존망이 걸린 일입니다. 미안합니다.”
이 한 마디를 뒤로 한 채 안중근은 동지 우덕순에게로 달려갔다.
우덕순은 단지동맹 동지는 아니었으나, 안중근이 누구보다 신뢰하는 인물이었다. 충청북도 제천 출신인 그는 안중근보다 두 살 많은 32세의 청년이었다. 서울에서 잡화상을 경영하다 4년 전 가족을 남겨둔 채 단신으로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와 담배장사를 하며 동포들에게 독립운동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안중근과 2년째 우정을 나눠온 그는 서로 호흡이 잘 맞는 동지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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