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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자유의 초원':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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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자유의 초원'

이정식 | 기사입력 2013/11/16 [21:35]

도스토예프스키의 '자유의 초원'

이정식 | 입력 : 2013/11/16 [21:35]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유를 억압당했던 4년간의 유형생활 중 때때로 수용소 인근 이르띠쉬 강변에 있는 벽돌광장에서 노역을 했다.
그는 이곳에 가기를 좋아했다. 사방이 막히지 않은 탁 트인 넓은 교외이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봄에서 여름동안 일하면서 체력도 좋아졌다. 처음에는 등에 8개의 벽돌밖에 지지 못했으나 나중에는 열두개까지 질 수 있었다.
그는 체력이 좋아진 것을 기뻐했다. “나는 출옥후에도 오래 살고 싶었다”고 그의 수기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술회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르띠쉬 강변에서 ‘자유의 초원’을 보았다.

▲ 시베리아 초원

▲ 시베리아 초원의 가을

자유의 초원

“내가 단지 몸이 단련된다는 이유만으로 벽돌 나르는 일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 내가 이 강변에 대해 그토록 자주 말을 꺼내는 이유는 그 강변에서만이 신의 세계가, 순결하고 투명한 저 먼 곳이, 황량함으로 내게 신비스러운 인상을 불러일으켰던 인적없는 자유의 초원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
(나는) 죄수들이 감옥의 창을 통해 자유세계를 동경하듯이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광야를 바라보곤 하였다. 무한히 펼쳐진 푸른 하늘에서 이글거리는 태양, 끼르끼즈 강변에서 퍼져 오는 끼르끼즈 인의 아련한 노랫소리. 이 모든 것이 내게는 더 할 수 없이 소중했다. 검게 그을고 낡은 유목민의 천막이 보이기도 했다. 천막 근처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두 마리의 양을 데리고 뭔가 바쁘게 일하고 있는 끼르끼즈의 여인도 보인다.
그 정경들은 궁핍하고 투박하긴 해도 자유스러워 보였다. 그러다가 문득 푸른 창공을 나는 이름 모를 새를 보면서 그의 비상을 좇아 시선을 옮기기도 하였다. 새는 수면 위를 살짝 차고 오르며 창공으로 사라져서는 아주 작은 점으로 아른거렸다.----. 이른 봄, 강변의 돌 틈새에 핀 초라하고 가녀린 꽃들까지도 병적이라 할 만큼 내 주의를 끌었다.“
(<죽음의 집의 기록> 중, 이덕형 옮김, 2000, 열린책들)

도스토예프스키의 수려한 필체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번역도 잘 되었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이러한 정경들도 수형 생활이 익숙해지면서 보이기 시작했다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다. 수형 생활 첫해에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 때문에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시베리아의 봄이래야 대개 6월경을 말하지만, 이때부터 한 여름 동안 드넓은 시베리아의 벌판위에는 각종 야생화의 축제가 펼쳐진다.
이 광경을 보면서 마음이 들뜨지 않고 자유로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 또한 유목민의 천막 근처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식사를 준비하는 연기가 아닐까. 거칠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가족이 단란하게 모여 식사를 하고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상상하며 자유를 꿈꾸었을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4년간의 유형 생뢀을 마감하는 겨울이 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겨울에 감옥에 들어갔으므로, 겨울에 들어온 것과 같은 날에 자유롭게 될 수 있었다.-----. 마침내 오래도록 기다리던 그 겨울이 온 것이다! 이따금 나의 가슴은 자유에 대한 커다란 예감 때문에 깊고 강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말을 하는 김에 여기서 잠깐 지적하자면, 공상과 오랜 얽매임의 결과 때문에 감옥에 있는 우리들에게 자유는 현실의 자유, 즉 실제로 현실에서 누리는 자유보다도 왠지 더 자유롭게 느껴졌다. 죄수들은 현실적인 자유의 개념을 과장하였지만, 이것은 모든 죄수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본질적인 것이었다. 어떤 다 헐어빠진 옷을 입은 병사라도 죄수들에 비하면 우리에게는 거의 왕처럼 자유로운 인간처럼 보이게 마련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머리도 깎이지 않고 족쇄도 감시병도 없이 다니기 때문이었다.“

▲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내 알혼섬의 강제수용소 접안 부두 잔해. 소비에트 시절 오믈(생선 이름)을 가공하는 수산물 가공소가 있던 바로 앞의 부두 흔적이다. 지명은 뼤씨얀카.

도스토예프스키는 마침내 형기를 채우고 감옥(수용소)을 나왔다. 감옥에서 나와서 그는 족쇄를 풀기위해 곧장 대장장이에게 가야했다. 대장장이는 그를 돌려 세우더니, 뒤에서 그의 발을 들어 올리고는 족쇄를 부쉈다.

“족쇄가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들어 올려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것들이 내 발에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레 놀라웠다. ---- 그렇다. 하느님의 은총과 함께! 자유, 새로운 생활,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순간인가!”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주어진 자유는 제한된 것이었다. 또다시 4년간의 강제 군 복무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54년 2월 중순 출옥하여 3월2일 시베리아의 세미팔라친스끄에 있는 제7대대에 사병으로 배치된다. 그는 38세 때인 1859년 3월 하사관으로 제대했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책을 읽는다. 감옥생활 중에는 성경 외에는 책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1855년부터 <죽음의 집의 기록>을 쓰기 시작했다. 1862년에야 전체를 탈고해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이 책은 장르상으로는 <수기>에 해당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후 1866년 1월부터 ‘죄와 벌’을 <러시아 통보>지에 연재하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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