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전설이 된 11명의 데카브리스트 부인들 발콘스키의 집과 함께 데카브리스트 기념관이 된 트루베츠코이의 집에는 시베리아에서 모진 고초를 겪으며 남편들의 유형생활을 뒷바라지 했던 11명의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의 초상이 걸려있다. 이가운데 이번 4편의 주인공 나탈리야는 세째줄 맨 오른쪽, 알렉산드라는 둘째줄 가운데에 있다. 이 초상들이 아래의 큰 초상들과 다른 이유는 제작년도의 차이로 보여진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성경책을 주었던 폰비진의 아내 나탈리야 나탈리야 드미뜨리예브나 폰비지나(1803~1869)는 1850년 1월 문호 도스또예프스끼(1821~1881)가 옴스크로 유형을 가던 중 따볼스크에 들렀을 때 그에게 지폐가 표지에 숨겨진 성경책을 주고 위로한 일로 유명하다. 이름인 나탈리야보다는 폰비진의 아내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나탈리야가 도스또예프스끼 등 뻬뜨라셰프스끼 사건(외무부 관리인 뻬뜨라셰프스끼가 체제 비판적 독서모임을 조직 운영한 사건)에 연류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 정치범들을 위로차 방문했을 때 여러 명의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이 함께 갔는데 이 가운데 앞서말한 뽈리나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뽈리나는 1839년부터 사면 때까지 따볼스크에서 살았으므로 한해 먼저 이곳에 와서 살고 있던 나탈리야와 자주 교류했을 것이다. 나탈리야의 남편 폰비진은 퇴역 장군으로 북부지역의 비밀 동맹원이었다. 그는 치타, 예니세이스크, 크라스노야르스크를 거쳐 1838년부터 따볼스크에서 유형생활을 했다.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나의 벗 나탈리야와의 슬프고 오랜 이별 끝에 오늘 그녀를 보았고 영혼이 다시 살아났다. 데카브리스트 부부들은 대개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나탈리야도 남편 보다 11살이 적었다. 그녀는 어려서 수녀원에 가려고 했을 정도로 종교적이었다. 도스또예프스끼를 만났을 때도 신앙에 관한 대화를 많이 나눴다. 그후에도 도스또예프스끼와는 가끔씩 편지를 주고 받았다. 두 사람의 편지에는 신앙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나탈리야는 유형을 가던 독서모임의 리더 뻬뜨라셰프스끼를 만났을 때 그로부터 드미뜨리가 이들 그룹에 들어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탈리야는 시베리아에서 두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모두 죽었다. 시베리아로 떠나기 전에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고 하는데 출생 여부는 알 수 없다. 큰 아들 드미뜨리마저 죽은 후 부부는 두 아이를 입양해 키웠다. 차이코프스키, 노년의 알렉산드라를 귀한 인간적 본보기로 평해 데카브리스트 부인들 중 또 다른 알렉산드라인 알렉산드라 이바노브나 다비도바 (1802~1895)는 데카브리스트 부인 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생존했다. “너의 엄마가 없었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다비도프 가는 작곡가 차이코프스키(1840~1893) 가와도 인연이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여동생이 다비도프의 아들과 결혼했으므로 사돈간이 된 셈이다. “카멘카에 살고 있는 다비도프 가족들의 높은 인간적 정신적 품성은 이곳 생활의 매력 전체이다. 데카브리스트의 부인들은 이처럼 시베리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도처에 훈훈한 인간적인 감동을 남겨놓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음으로써 러시아의 역사에 슬프고도 아름다운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트루베츠코이의 집 전시실 일부와 기념관 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