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전설, 데카브리스트의 부인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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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전설, 데카브리스트의 부인들 (2)
  • 이정식 / 언론인
  • 승인 2014.03.08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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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밀라의 순정과 비운
▲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 (겨울)

사형 또는 유형에 처해진 121명의 데카브리스트들 가운데 결혼한 이들은 23명이었다. 사형당한 5명 가운데는 2명이 기혼자였다. 나머지 21명 가운데 11명이 남편을 뒤따라 시베리아로 갔다. 

시베리아로 간 여인들 중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가 결혼을 한 사례들도 있다. 이 케이스도 물론 남편을 따라간 11명의 부인들에 속한다.
11명 가운데 1856년 사면령이 내려질때까지 30년간 살아남은 부인은 8명이었다. 트루베츠코이 부인 예카테리나 등 3명은 이미 시베리아에 묻혔다. 8명중에서도 남편과 모두 살아 돌아온 사람은 발콘스키 부인 마리야를 포함해 5명 뿐이었고, 3명은 미망인이 되어 돌아왔다.

절망의 순간에 시베리아에 나타난 애인

프랑스인인 까밀라 뻬뜨로브나 이바쉐바(1801-1839)는 나폴레옹을 피해 러시아로 온 공화주의자인 아버지와 가정교사였던 어머니를 부모로 태어났다.
그녀는 기병장교이며 화가였던 이바쉐프와의 사랑에 빠졌으나 결혼까지는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이바쉐프가 1824년 12월의 데카브리스트의 난에 연류된 죄로 체포되어 20년의 강제노동 유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로 떠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까밀라는 이바쉐프가 유형수가 되자 그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하고 황제에게 그를 따라 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청원을 했다.
편지에서 그녀는 “저는 어린 시절부터 그를 사랑했고, 그가 불행해진 순간부터 그의 삶이 저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꼈으며 그의 고통스러운 운명을 함께 나누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그의 결심을 밝혔다.
오랜 청원 끝에 마침내 황제의 허락이 내려졌고, 그녀는 1831년 6월 시베리아로 떠났다. 트루베츠코이 부인 예카테리나가 1826년 6월 시베리아로 처음 떠난 것에 비하면 4년이나 늦은 출발이었다. 그러나 까밀라는 부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몇 년의 세월이 지났으므로 이바쉐프가 시베리아 유형지로 오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도 알 수 없었다.

▲ 까밀라 뻬뜨로브나 이바쉐바 (1808~1839)

이바쉐프는 유형수 생활이 오래 계속되면서 깊은 절망에 빠져있을 때 까밀라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내 시베리아에 도착한 까밀라는 발콘스키 부인의 집에 머물다가 1주일 뒤에 이바쉐프와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결혼 한달 후부터 정치범 독감방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까밀라는 명랑하고 친절한 성격이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두루 사랑을 받았다.
결혼 후 두 사람은 마리야, 베라, 뾰뜨르 등 세 자녀를 두었다.
1839년 초, 까밀라의 어머니가 그들이 살고 있던 뚜린스크로 와서 아이들을 키워주며 함께 살았는데, 이해 12월 까밀라가 감기에 걸린 상태에서 조산을 하면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31세였다.
이바쉐프가 받은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바쉐프는 까밀라가 죽은지 꼭 1년 후 돌연 세상을 떠났다. 자살했다는 얘기도 있다. 까밀라의 1주기 때 이바쉐프의 장례식이 치러져 주위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이바쉐프는 까밀라를 잃은 후 어느 편지에 까밀라가 세상을 떠나던 날에 대해 이렇게 썼다.

“우리들의 슬픈 이별 직전의 밤,
마치 병도 맥을 못 추는 것처럼
머리를 가볍게 들고 경건함으로 신앙의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두 번 축복을 해 주었고
둘러싸고 있는 슬퍼하는 벗들과
진심으로 존경하는 작별의 말을 하며
이별 인사를 할 수 있었다.
나와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우리는 그녀로부터 떨어질 수 없었다.
먼저 그녀는 우리들의 손을 하나로 모았고
각각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차례대로 우리들과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았다.
나는 내 손으로 그녀를 따뜻하게 하며
그녀의 손을 뺨에 대고 꽉 눌렀다.
그리고 그녀는 이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녀 생의 마지막 말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손으로 나를 잡고 반만 뜬 눈으로 말했다.
“불쌍한 바질”
그리고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맞다.
끔찍하게 가련하고
끔찍하게 불행하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나의 부모들의 위로가 되었고
나에게 8년간의 행복, 헌신성, 사랑을 주었던 나의 연인도
어떠한 사랑도
나에게는 더 이상 없게 되었다.“

/(장민석 번역 인용) 

▲ 이르쿠츠크 트루베츠코이 집에 있는 까밀라의 영정과 편지 등 유품.(2014년 2월, 사진=이정식)

뒤마의 소설이 된 프라스코비야와 안넨코프의 사랑

프라스코비야 이고로브나 안넨코바도 프랑스인이다. 처녀 시절의 이름은 자네따 뽈리나 게블. 아버지는 나폴레옹군의 장교였다. 그녀는 1823년 양재사로 모스크바에 왔다. 그녀의 드레스살롱에는 잘 생긴 장교 안넨코프를 동행하고 그의 어머니가 단골로 찾아왔다.
몇 번의 만남으로 젊은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맞아 사랑에 빠졌으나 안넨코프의 어머니는 귀족인 아들과 신분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하지 않았다. 안넨코프는 막대한 재산의 유일한 상속자이기도 했다.
안넨코프는 뽈리나에게 비밀 결혼을 하자고 제안했으나 그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났고, 북부동맹원이었던 안넨코프는 체포되어 20년 강제노동 유형 판결을 받았다. (나중에 15년으로 감형되었다.)

▲ 뽈리나 (프라스코비야 이고로브나 안넨코바, 1800~1876)

이 사건이 났을 때 뽈리나는 임신 중이었다. 딸을 낳은 후 아이의 아버지인 안넨코프를 만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반면, 뽈리나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한 안넨코프는 그녀가 자신을 버린 것으로 생각하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곧바로 구조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사건 1년 후인 1826년 12월 안넨코프는 차타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당시 치타에서는 트루베츠코이, 발콘스키, 무라비에프 등이 광산에서 노역을 하고 있었다.
뽈리나는 시베리아로 가기로 결심하고 황제에게 청원을 시작했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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