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충청 탐구(1)] 4.19도화선 된 3.8대전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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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충청 탐구(1)] 4.19도화선 된 3.8대전의거
  • 신수용 대기자
  • 승인 2019.04.18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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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은 지금 정치권에서 보는 변방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숨결이 살아있고 금강과 계룡산, 칠갑산, 속리산을 중심으로 인심이 후한 역사의 중심이었습니다. 때문에 역사의 창고라고 합니다. 잃어버린 역사 백제라고 말하지만 선사이래 고조선과 삼국시대, 고려와 조선시대, 구 한말과 근세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토의 중심부에서 영욕의 세월과 부침이 있던 곳이지요. 그렇기에 충청의 모든 것은 역사와 우리 민족의 산 증인인 셈입니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돌 하나, 풀 한포기, 깊은 숲 대나무 한 그루, 무너진 성터... 모두 인고의 세월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가둬 둘 수도, 그렇다고 열어놓을 수 없는 역사 속에 충청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새롭게 조명할 이유입니다. 세종경제신문이 창간 6주년을 맞아 <탐사기획>으로 충청 100년의 숱한 얘기들은 집중탐구합니다.거기에는 인물. 문화재. 유적. 유물. 사변 등 충청역사를  [편집자 주]

 

 

증언의 얼굴.

 

천둥하는 몸짓 출렁였다.

가슴 터지는 아우성 드높았다

1960년 3월 8일

민주의 목숨을 위해

자유의 광명을 찾아

파도처럼, 대전의 학생의거

양양했다. 우뚝했다

무지한 총부리도

비겁한 방망이도

못난 바리케이트도

모두 기세를 잃고

정의의 깃발로 올린

역사의 불꽃 진실로 뜨거웠다.

시대의 검은 장막을 뚫고

저 눈부신 하늘 향해

증언의 얼굴로 탑이 서다

-<증인의 얼굴.김용재.3.8의거 기념사업회이사장>

[세종경제=신수용 대기자]암울했던 59년 전 자유당 독재정권의 부정과 부패, 인권유린에 정면으로 맞선 학생들의 4.19혁명을 기억한다.

고귀한 학생들의 피로물든 4.19혁명은 민주와 정의를 갈구한 민심으로 응집, 끝내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부패 정권을 향한 저항 운동은 민의로 이어졌다. 대표적으로 대구의 2.28의거,  대전의 3.8의거, 마산의 3.15의거 등이 꼽힌다.

대전 3.8민주의거는 지난1960년 3월 8일 대전공설운동장에서 열리는 야당 부통령후보 선거연설회를 참여를 막는데 항의하며 나선 충청권 고교생들의 첫 저항운동이다.

대전고등학교 학생 1,000여명이 거리로 나온 충청권 최초의 학생운동이며 지역민주화운동의 효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자유당 독재와 부패에 항거하며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며 촉발됐다.

이어 대전공고, 보문고, 대전상고, 대전여고 등 지역 고교생들이 합세해 3월10일까지 민주와 시위를 벌였다.
4.19혁명의 3대의거로 평가받지만 정권마다 집권자의 연고인 대구 2.28의거, 마산 3.15의거만 주목했지, 대전 3.8의거는 지난해가 돼서야 국가기념일로 지정,공포됐다.

 3.8민주의거는 지난 2013년 4월29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국회본회의를 통과하고, 같은 해 5월22일 공포됨으로써 민주화에 기여한 업적을 인정받았다. 

 1960년 당시 대전고등학교 2학년으로서 3.8의거를 주도하고 4.19혁명을 겪은 김용재(76)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 1960년 대전고생들의 이승만 독재에 항의하는 3.8의거.이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사진=3.8의거 기념사업회 제공]

 1960년 그해는 한국역사를 뒤흔든 해이다. 집권당인 자유당에서  대통령후보 이승만-부통령후보 이기붕, 야당인 민주당은 대통령후보 조병옥 부통령후보 장면이 맞대결을 벌였다. 

 4년 전인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대통령보다 크게 앞섰던 민주당 해공 신익희선생이 의문사한 뒤 치르는 대선이 그해 있었다. 

 4년 전 해공선생이 호남선열차에서 급서하는 바람에 야당대선 후보없어 사표(死票)가 될 줄 알면서 44%를 얻을 정도로 민심은 기울었었다.   

  1960년, 다시 이승만.이기붕에 맞서 조병옥.장면이 맞섰다. 당시 야당유세가 2월28일 대구부터 시작됐다. 대구에서는 일요일인데도 경북고, 경북여고생들을 등교시켰다. 야당유세에 참여를 막기위해서다. 이에 항의하며 대구지역 고교생이 거센 시위를 벌였다. 이게 2.28대구의거다.  

대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해  3월8일 오후에 야당 부통령 후보 장면 박사의 선거유세가 대전공설운동장에 준비돼 있었다. 박순천 야당대표 등 야당 거물급 인사들이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자 각급 고교에서는 야당유세를 막았다. 교육청에서도 각급학교에 고교생이 유세장에 나오지 않게 훈육하라는 공문을 여러차례 보냈다. 만의하나 학생이 나오면 해당 교장.교감등을 문책하겠다고 엄포도 놨다.  

앞서 대구에서 민주당 유세가 있던 2·28 후, 박제구 대전고 학도호국단 대대장에게 친구들이 와서 귀띔했다.

대구에서 야당유세장에 못가게 막았다가 학생들이 들고 일이넜다는데 우리도 움직여야 되지 않느나것이다.

 그날 저녁 보문고에 다니던 강무송 네 집 신도극장 옆 식당에서 10여 명이 모여 대전시내 고교 합동으로 시위를 하기로 했다.  대전상고, 대전사범, 대전여고 등의 대표에게 연락을 했고 이튿날 낮 12시까지 대전 동구  YMCA에서 회동하기로 했다.

 3.1절 행사 이후 다음날인 3월 2일,  대전지역 몇몇 고등학교 학생 대표들이 모여서 연합시위를 벌이기로 합의했다. 참가했던 학교는 대전공업고, 보문고, 대전상고, 대전고, 대전여고, 호수돈여고, 대전사범학교 대표등이다. 그날을 민주의거 거사일로 정했다. 

 3월 3일 박제구가 학교에 갔더니 이미 학교는 발칵 뒤집어져 있었다.

  “데모하려고 계획했다며, 쓸데없는 짓 하지마라.”.

 하지만 훗날 드러났지만 당시 거사를 합의한 대표 중 한 명이 집에 돌아가 경찰인 친형에게 사실을 말했다.

때문에 보문고와 대전공업고에서 갑작스럽게 학기말 시험을 치르는 일이 생겼다.

 

▲ ▲ 1960년 대전고생들의 이승만 독재에 항의하는 3.8의거.이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사진=3.8의거 기념사업회 제공]

학생들을 학교에 잡아두려는 학교측의 계획이었다. 경찰도 나섰다. 정보과 형사들이 공공연히 학교를 드나들었고, 학생대표들을 불러 회유와 감시를 강화했다. 

 거사 전날인 3월7일 대전고의 경우 학도호국단 대표 25명이 교문 밖 교장 관사로 호출돼 훈시를 들었다. 거사를 막기위해 관사에 잡아드기위해서다. 교장의 훈시는 집단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3월 8일 점심을 먹고 계속 감금상태에 있었다. 그날 공설운동장에서 열리는 민주당 강연이 끝날 때까지 잡아놓으려는 계산이었다. 그때 담을 뛰어넘으며 규율부장 최정일이 “나가자”고 소리쳤다. 규율부장의 외침에 각 반 대표들도 나가자고 소리쳤고 갇혀있던 간부들도 앞다퉈 선봉장으로 나갔다.
 

박제구와 최정일은 학교에 남아 기다리던 대표들에게 연락, 각 학년에 간부들을 배치해 운동장에 집결시켰다.

이후 학도호국단 대대부관 홍석곤이 작성한 결의문을 낭독했다.  

결의문의 내용은 이랬다. 하나, 학원의 정치 도구화를 단호히 배격한다. 하나, 서울신문의 강제 구독을 배격한다. 하나,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고, 학생 동태 감시를 즉각 중단하라. 하나, 신성한 학원에서의 선거 운동을 배척하며, 어떠한 사회적 세력의 침투도 용납할 수 없다.하나, 우리의 거사는 오로지 정의감과 순수한 자발적 의사에서 나온 것임을 밝힌다.

1960년 3월 8일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불의, 반민주적인 불법·부정 선거에 대한 항거로 그간 누적된 분노를 위와 같이 토해냈다. 

그중에도 학원의 정치 도구화를 단호히 배격한다는 내용과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고, 학생 동태 감시를 즉각 중단하라, 신성한 학원에서의 선거 운동과 여하한 사회적 세력의 침투를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 등은 학생들의 정의를 불살랐다.

▲ 1960년 대전고생들의 이승만 독재에 항의하는 3.8의거로 촉발된 4.19 혁명.4.19 혁명의 날 앞 충남도청정문에 몰려가 이승만독재 타도를 외치는 대전지역고교생과 시민들[사진=3.8의거 기념사업회 제공]


낭독 후 학생들은 결의문 문구를 외치며 막힌 정문과 담을 넘어, 길을 따라 대전공설운동장까지 행진에 나섰다. 

학생들의 결의문 낭독이 이어지자 충남지방경찰청 무장경찰이 이를 제지하고 나섰다.

경찰들은 학생들을 무지막지하게 폭행했다. 하지만 민주화를 향한 이들의 열정을 막을 순 없었다.  

야당 부통령후보인 장면의 선거연설회에 맞춰 대전고등학교 1·2학년 1000여명이 거리로 나와 독재타도와 학원의 자유를 외쳤다.

 유세장에 도착하기전에 무장경찰의 강제 진압에 직면했다. 충남 도경 경찰과 대전경찰서 경찰은 대전고생들의 스크럼행렬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때렸다. 

 총 개머리판이나, 휴대하고 있던 방망이로 인정사정없이 내리쳤다. 경찰 백차와 기마부대도 동원됐고, 소방차로 물을 뿌리기도 했다.

 대전고 학생들은 머리와 팔, 다리 등에 부상을 입어 피를 흘렸다.어떤 학생은 방망이로 귀를 맞아 고막이 파열됐다는 얘기가 돌자 시위학생들은 ‘ 이승만 독재 물러가라’는 구호가 더 거셌다.

 후보인 장면의 선거연설회에 맞춰 대전고등학교 1·2학년 1000여명이 거리로 나와 독재타도와 학원의 자유를 외쳤다.

▲ 대전서구 둔지미공원에 있는 3.8대전의거 기념탑[사진=신수용 대기자]

 고등학생 신분으로 독재정권에 항거한 이 사건은 당시만 해도 엄청난 이슈였다. 학생들의 결의문 낭독이 이어지자 무장경찰이 이를 제지하고 나섰다. 경찰들은 학생들을 무지막지하게 폭행했다.

 하지만 민주화를 향한 이들의 열정을 막을 순 없었다.

 대전고에서 유세장인 대전공설운동장으로 이어진 대흥동-문창동 골목길마다 앞뒤로 곤봉을 든 진압경찰이 있어 탈출구는 없었다. 많은 학생들의 머리에서는 피가 흘렀다. 어떤 학생의 가슴 왼쪽에 새겨진 이름표를 붉게 물들였다.  

 학교에서 나온 대전고생들은 대흥동사거리로 해서 공설운동장, 인동시장으로, 대전역으로, 도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학생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 “서울신문 강제구독 사절” 등을 목청껏 외쳤다.

 많은 학생은 바닥에 주저앉기도했고, 어떤 친구들은 전진을 멈추지 않고 무장경찰들의 곤봉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다리를 삐고, 팔꿈치가 부서지고, 고막이 터지고. 하지만 그들의 입에선 ‘학원에 자유를 달라’는 외침이 계속해서 울려퍼졌다.
 그때 한 경찰이 학생의 멱살을 잡아채며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거세게 끈 탓에 이름표가 찢겨 바닥으로 떨어졌다. 흙과 피로 물든 탓에 쓰여진 이름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끌고갔다. 

 찢겨져 나간 이름표를 흙바닥에 뒹굴게 두자. 붉게 물든 이름표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경찰에 연행돼 혹독한 고문과 구타를 당한 학생들이 많았다. 8,9년 전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어머님과 살던 학생에게도 곤봉구타는 멈추지 않았다. 

▲ 1960년 3월9일자 동아일보.대전일보등이 3.8의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사진=대전한밭도서관 제공]

 행진대열 선두는 무장경찰과 경찰백차의 제지를 받고 몇 개 집단으로 갈라지고 끊어졌다. 시위대열 학생들은 사정없이 후려치는 무장경찰에 교복은 찢어지고 손과 발은 피로 얼룩졌다.

 목덜미를 끌려 연행되기도 하고, 논바닥에 밀려 반 흙투성이가 되고 근처 똥통에 빠지기도 했다. 무장경찰의 집중저지에 맞서기 위해 돌을 주워 던지며 일부는 신도극장 쪽으로 보문고, 목척시장을 거쳐 도청으로 일부는 대흥동 시외버스터미널(현 대림빌딩)로 온 시내가 출렁였다.

 학생들을 염려해 따라온 교사 중 두 분도 곤봉으로 구타를 당해 코뼈가 부러졌다. 이를 본 학생들은 더욱 격렬해졌다.

 그 두분의 교사는 학생들앞에서 수갑에 채워져 연행되는 수모도 겪었다. 경찰은 학생들을 트럭에 마구잡이로 떠밀어 100여명이 붙잡혀 갔다. 이과정에서 학생들의 교복, 모자, 신발 등 소지품을 잃고 아수라장이었다.  

 학생들은 진압경찰의 마구잡이 구타와 폭력을 피해 논과 밭으로 달아나다 거름을 만들려고 인분을 채워놓은 구덩이에 빠지기도 했다. 대전시민들은 학생들을 숨겨주기도 하고, 음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3월 9일,100여 명이 경찰서로 연행됐다. 박제구, 박선영이 주동자로 지목돼 둘만 남기고 모두 귀가조치 됐다. 시간이 언제인지도 모를 지하실로 끌려가 상처도 안나게 기술적으로 맞았다. 귀가한 후로도 이들은 수시로 경찰서, 충남도경에 끌려갔다.

 그자리에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인동까지 동행한 조남호 선생도 선동자로 끌려갔다.  

 그렇게 독재정권을 지나 이 나라에 민주화가 올 때까지 그들은 감시와 협박 속에 살았다.경찰에 잡혀간 학생들은 경찰서에서 학생대표와 일반학생을 분류했다. 일반학생들은 구타와 ‘원산폭격’이라는 폭력을 받다가 그날 저녁 대부분 훈방조치됐다.

그렇지만 학생 대표들은 구타와 폭행, 그리고 조사를 받은 뒤 새벽녘에 귀가했다. 경찰들은 교장선생님이 사정해서 훈방조치 되는 것이라고 생색을 냈다. 

그리고 10일까지 시위는 계속됐다. 3.15 선거는 부정으로 치러졌다. 

대전고교에 이어 10일에는 대전상고 학생 600여명이 자유당의 정부통령 선거전략을 규탄하고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대전의 3.8의거에 이어 마산앞바다에서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떠오르자 전국에서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본격 이승만 타도 시위에 나섰다.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 이만섭기자(전 국회의장)가 김주열열사의 사실을 특종보도한 뒤 이기붕 부통령후보에게 후보직 사퇴를 물었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4월26일 대전에서 실제적인 시위가 전개됐다. 대전고 등 대전지역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참가해 힘을 보탰다.

그러나 3·8 민주의거에 참여했던 일부 학생들과 교사는 경찰의 구타와 폭행으로 고막이 터지고 크게 다쳐 평생을 시위 후유증으로 살아가야 했다.  4·19에 동참했던 대전고 출신 졸업생 3명은 4·19 혁명 당시 희생됐다.

마산앞바다에서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떠오르자 전국에서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본격 이승만 타도 시위에 나섰다. 

4월26일 대전에서 실제적인 시위가 전개됐다. 대전고 등 대전지역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참가해 힘을 보탰다. 

대전 3·8의거는 당시 참여를 주도한 대전고와 대전상고의 교내 행사로 이어져 왔을 뿐 그 정신이 축소된 채 계승돼 왔다. 

그러나 200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대전에서 이 민주화 정신을 이어받자는 운동이 크게 확산돼 두 학교 출신의 민주의거 참가자들을 중심으로 3·8민주화의거기념사업회가 창립됐다.

대전시는 3.8민주의거를 기념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 대전서구 둔산동 둔지미 공원 근린공원 내 부지 3300㎡에 높이 25m 규모로 '3.8민주의거기념탑'을 세웠고 3.8의거 시발점이 된 대전고 교정에도 '3.8민주의거 기념비'가, 목척교 옆에는 지난 2010년 '4.19혁명의 진원지'라는 기념비가 건립됐다.

지난 2009년 대전일보사가 이를 정부기념일로 지정하여 뜻을 기리자고 시리즈로 보도하면서 몰랐던 이 사실이 퍼져났다. 같은해  대전시의회는 '3.8민주의거 기념조례'를 제정했다.이어  2013년 4월 29일에는 대전고 출신이자 충남 아산지역구 자유한국당 이명수 국회의원에 의해 3·8의거를 민주화운동 범위에 포함시키는 내용의 법안(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지난 달 8일 처음 정부주관으로 처음 열린 3.18의거 기념일에는 이낙연 국무총리등 정부,정치권인사들과 당시 의거 참가자 및 4.19 혁명 유공자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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