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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러시아 문학기행]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도스토옙스키를 알아본 미술품 수집가 트레티야코프
이정식 / 언론인  |  webmaster@sejongeconom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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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2.26  14: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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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라야루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의 유흐노비치 관장이 도스토옙스키의 사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18년 8월)

스타라야루사의 도스토옙스키 초상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이에 위치한 스타라야루사의 도스토옙스키 박물관(*도스토옙스키의 처음이자 마지막 별장)은 도스토옙스키 가족이 살던 2층의 6개 방을 주전시실로 하고 있다. 1층에는 작은 세미나실 같은 방의 벽면과 유리전시대에 유형살이와 관계된 인물들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박물관의 율리야 유흐노비치 관장 대행은 우리(필자와 박정곤 교수)를 만나자 바로 2층으로 올라가 2층 베란다에 놓여져 있는 도스토옙스키 초상화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했다. 초상화는 우리가 가장 많이 보아 온 도스토옙스키 초상화였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 바실리 페로프(1833~1882)가 그린 것이다.

관장은 이곳의 초상화는 페로프가 그린 원본이 아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니난 예로토바라는 화가가 그린 복제품이라고 설명했다. 원본과 거의 비슷하여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별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현재 원본은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초상화는 1872년 유명한 미술품 수집가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티야코프(1832~1898)의 요청으로 페로프가 그린 것인데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적인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트레티야코프는 당시 유명 문인들의 모습을 당대 최고의 화가들에게 부탁해 그리도록 했다.

이 그림은 도스토옙스키가 유럽에서 귀국한 그해인 1871년 말에 시작돼 이듬해 완성됐다. 도스토옙스키가 귀국해 보니 『백치』, 『악령』등의 성공으로 그의 명성이 트레티야코프가 초상화를 부탁할 정도로 높아져 있었던 것이다. 짙은 그린색 두터운 재킷 차림의 수수한 그의 복장은 당시 넉넉지 않았던 그의 경제 상황을 짐작케 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도스토옙스키 집의 살림 형편이 조금씩 펴지기 시작한 것은 안나가 출판업을 시작한 1873년부터라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다. 이 초상화에 대해서 안나는 회고록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에 이렇게 기록했다.

   
▲ 당대의 러시아 재벌이며 미술품 수집가였던 트레티야코프

초상화에 대한 안나의 회고

"그해(1871년) 겨울에는 모스크바의 유명한 미술품 수집가이자 미술관 소유주인 뜨레찌야꼬프가 남편에게 미술관에 소장할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를 위해 유명한 화가인 뻬로프가 모스크바에서 왔고, 작업을 시작하기 전 일주일간 그는 매일 우리를 찾아왔다. 뻬로프는 그야말로 다양한 정서 상태의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논쟁을 유도하면서 남편의 얼굴에서 가장 특징적인 표정을 포착해냈다, 그것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가 예술적 사고에 몰입해 있을 때의 표정이었다. 뻬로프는 ‘도스토에프스끼의 창작 순간’을 초상화에 붙박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의 서재에 들어갔다가 그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떠오른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마치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 같을 때는 아무 말 없이 서재를 빠져나오곤 했다. 나중에 이야기하다 보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자기 생각에 완전히 빠져서 내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고, 내가 자기 방에 다녀갔다는 것도 믿지 않았다.뻬로프는 똑똑하고 친절한 사람이어서 남편은 그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참석했다. 뻬로프에 관해서는 정말 좋은 추억을 갖고 있다."

페로프가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를 완성한 것은 1872년 5월이었다. 다섯달이나 걸린 것이다. 이 초상화에 대해 트레티야코프가 페로프에게 준 사례비는 6백 루블이었다.

현재 모스크바 레닌 국립도서관 앞의 동상도 페로프의 그림을 보고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다만 그가 앉아 있는 자세가 어정쩡해서, “치질환자 같다”는 등 야유도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실제 치질 환자이기도 했다.

그림을 그린 바실리 페로프는 당대 최고 화가 중 한사람이었다. 현(縣)지사였던 게오르기 크리데네르 남작의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작위는 물론 성(姓)도 물려받지 못했다. 태어난해도 1833년인지 1834년인지 분명치 않다. 공식문서에는 대부의 이름을 따서 바실리예프라는 성으로 등록되어있다고 한다. 미술학교에서부터 사람들이 그를 페로프라고 불렀다. ‘페로’는 러시아어로 펜이란 뜻이다. 그가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그의 선생이 붙여준 별명으로 알려져있다. 그도 이 별명을 좋아해 이름으로 굳어졌다. 넵스키, 레닌 등의 이름이 별명 또는 필명에서 왔듯이 페로프도 그 경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미술품 수집가 트레티야코프

모스크바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트레티야코프는 스물 네 살 때인 1856년부터 러시아의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면서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도스토옙스키의 경우처럼 유명 작가 등의 초상을 그리도록 유명화가들에게 의뢰하기도 했다. 그의 꿈은 러시아 미술가들의 그림으로 가득한 국민 미술관을 남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1856년 개관했다. 그후 1892년 자신이 소장한 2천 여점의 회화, 조각 드로잉 등을 모스크바 시에 기증했다. 미술관은 볼셰비키 혁명 직후인 1918년 국유화 되었다.

오늘날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11세기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13만점이 넘는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최고의 러시아 미술박물관이다. 트레티야코프의 꿈이 만들어 낸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기왕에 그림이야기가 나왔으니 도스토옙스키가 숨을 거둔 직후에 찾아와 잠든 듯한 그의 마지막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크람스코이(1837~1887)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크람스코이는 당대의 유명한 초상화가로 도스토옙스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초상집으로 찾아와 그림을 그렸다. 안나의 회고록을 다시 보자.

   
▲ 크람슼코이가 그린 도스토옙스키의 최후 (1881)

"남편이 죽은 다음날 우리집에 찾아왔던 많은 사람들 중에는 유명한 화가인 끄람스꼬이가 있었다. 그는 고인의 초상화를 실물 크기로 그리고자 했고, 대단한 솜씨로 그 그림을 그려냈다. 그 초상화 속의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죽은 것이 아니라 그저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밝은 얼굴은 마치 아무도 모르는 내세의 비밀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는 듯 미소마저 띠고 있다.

끄람스꼬이 외에도 몇몇 화가들과 사진작가들이 와서 화집을 발간한다며 고인의 초상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었다. 지금은 유명해졌지만 당시에는 무명이었던 조각가 레오뽈드 베른쉬땀이 우리를 방문하여 남편의 얼굴본을 떠가기도 했다. 덕분에 나중에 그는 남편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흉상을 제작할 수 있었다."

크람스코이 역시 당대의 유명한 초상화가다. 그는 9세기 후반 러시아의 대표적인 미술 그룹인 ‘이동파’를 이끌었다. ‘이동파’란 여러 도시를 이동하며 전시회를 개최하는 그룹이라는 의미다. 여기에는 일리야 레핀, 바실리 수리코프 등 저명한 러시아 화가들이 참여했다. 크람스코이는 1873년에는 톨스토이의 초상화를 그린 바 있다. 그가 1883년에 그린 ‘미지의 여인’은 특히 유명하다. 누구나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그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톨스토이의 명작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 안나를 연상케 한다는 분석도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사진

앞서 안나의 회고록 중 화가 뿐만 아니라 사진작가들도 조문을 와 사진을 찍어갔다고 했는데, 그 중 관에 누워있는 도스토옙스키의 모습을 찍은 사진작가 샤피로의 사진이 알려져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사진은 유형을 마치고 군 복무를 할 때인 1850년대 말 세미팔라친스크에서 찍은 것으로 알려진 장교복을 입은 사진과 젊은 카자흐 학자 발리하노프와 함께 찍은 사진을 비롯, 20여 장 정도가 있다.

사진은 19세기 전반부터 유럽에서 발달되기 시작했는데 러시아에도 곧장 수입돼 19세기 중엽부터는 많은 귀족들과 돈 있는 평민들이 인물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자신의 초상화를 갖는 것이 귀족들의 취미였으므로 사진 찍기도 차츰 상류사회의 유행이 되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최초의 사진을 찍은 해가 1858년인지 1859년인지는 분명치 않다. 1859년은 그가 강제군복무를 마치고 근 10년만에 시베리아를 떠난 해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에는 1860년부터 양복을 입거나 코트로 정장을 한 사진들이 남아있다.

여러 사진들 가운데 안나가 가장 좋아한 사진이 있다.

   
▲ 파노프가 찍은 도스토옙스키의 사진(1880)

1880년 6월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푸시킨 동상 건립 기념 연설 다음날 파노프가 찍은 사진이다. 다시 안나의 회고를 들어본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그 다음날 아침 모스끄바의 일류 사진작가였던 빠노프가 자신을 찾아 온 이야기도 해 주었다. 빠노프는 남편에게 그의 초상 사진을 찍게해 달라고 간청했다. 남편은 모스크바를 떠나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빠노프와 함께 그의 사진관으로 갔다. 그날 찍은 사진 속에는 남편이 전날의 기념비적 사건에서 받은 감흥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었다. 언제나 표정이 달랐던(기분이 변화무쌍했던 덕분에) 표도르 미하일로비치의 수많은 초상 사진 중에 나는 이 사진을 으뜸으로 꼽는다. 남편이 가슴 벅찬 기쁨이나 행복을 느낀 순간에 내가 그의 얼굴에서 수없이 봐온 그 표정이 이 사진에 어려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푸시킨 동상 제막식에서 자신의 대중적 인기를 확인한 후 기분이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안나는 이 사진에 도스토옙스키의 행복한 감정이 담겨있는 것으로 보았다. 타인의 눈으로는 사진만으로 도스토옙스키의 그같은 감정을 알 수가 없다. 안나만이 그 사진의 표정을 그렇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조용한 스타라야루사 별장

베란다의 도스토옙스키 초상화에 대한 유흐노비치 관장대행의 설명을 듣고 안으로 들어가니 첫 번 전시실의 작은 테이블 위에 두 종류의 신문이 놓여있었다. 관장 대행은 “이 신문들은 1875년 이 지방에서 발생했던 나자로프란 사람의 부친살해사건에 대한 기사가 실렸던 당시 발행되던 신문인데, 기사가 실린 날짜의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녀는 이어 “여기에 실린 부친 살해 사건은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소설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 스타라야루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옛 도스토옙스키 별장)과 페레리치차강

이 방에는 도스토옙스키가 썼던 모자와 흰색 장갑, 지팡이 등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진품이라고 했다. 도스토옙스키도 그 시절의 상류층들처럼 때로는 꽤 멋을 낸 것 같다.

그 다음방에는 안나와 류보피가 쳤다는 오르간이 창 쪽에 놓여있었다. 오르간은 도스토옙스키가 안나와 아이들을 위해 직접 구매한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저녁이면 오르간 반주에 맞추어 아이들과 안나와 함께 카드릴, 왈츠, 마주르카를 추곤 했다. 안나는 남편이 특히 마주르카를 추기를 좋아했다고 회고록에 남겼다.

이 방에는 도스토옙스키의 가족들의 사진 다섯 장이 걸려있었다. 가족이 모두 함께 찍은 사진은 없다. 3살에 죽은 막내 아들 알료샤의 사진을 포함해 도스토옙스키와 안나, 딸 류보피, 아들 표도르의 사진이다. 형 미하일의 사진도 있었고, 도스토옙스키가 한 때 결혼을 생각했던 작가지망생 안나 고르빈-그루코프스카야와 그녀의 프랑스인 남편 사진도 한쪽 벽에 걸려있었다.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 대로 안나 고르빈-그루코프스카야는 도스토옙스키와 결별한 후 프랑스로 떠나 자끌라르라는 혁명가와 결혼했다. 그후 안나-자끌라르 부부가 프랑스로부터 도피해 러시아로 들어와 살게됐을 때 도스토옙스키 부부와 좋은 관계로 지냈다. 그래서 그 부부의 사진을 걸어 놓은 모양이었다.

세 번째 방은 도스토옙스키의 서재다. 좁은 강폭의 페레리치차강이 오래된 나무 사이로 바로 내려다 보였다. 한 구석에는 작은 책상이 놓여있었는데, 도스토옙스키가 쓰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책상 옆에는 도스토옙스키가 침대로 사용하던 소파가 있었다. 물론 이것도 당시의 것은 아니다. 벽 한쪽에는 도스토옙스키가 좋아했던 푸시킨, 디킨스, 셰익스피어, 발자크의 작은 초상화도 걸려있었다.

그 다음 방은 제법 컸는데, 작지 않은 식탁이 가운데 놓여있고, 한쪽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자리하고 있다. 그랜드 피아노는 도스토옙스키 사후에도 모친과 이곳에서 살았던 류보피가 집에서 피아노를 쳤다는 기록이 있어 전시해 놓은 것이라고 했다. 이 방은 식당을 겸했으므로 당시의 끓는 물 주전자 사모바르도 전시되어 있었다.

다섯째 전시실은 안나의 방인데, 침대와 책상 등이 있었고, 여섯 번째 방은 아이들 방으로 소파에는 인형이 놓여있었고, 벽에는 성장한 류보피와 표도르의 사진과 이콘 등이 걸려 있었다.

아이들 방에서 좁은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가니 작은 세미나실이 나온다. 벽과 주변에 유형과 관련된 사진 즉 페트라셰프스키 사건과 관련자들의 사진과 토볼스크에서 만난 데카브리스트 부인 폰비지나와 안넨코바의 사진과 여러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유흐노비치 관장대행은 우리가 박물관을 찾아가던 중에 본 인근의 도스토엡스키 동상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동상이 서있는 곳은 소설에 나오는 장소로서, 2001년 도스토옙스키 사후 120주기를 맞아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 전국의 독자들의 성금으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조각가도 유명한 사람인데도 돈을 받지 않고 만들어주었다고 말했다.

내가 “그동안 본 도스토옙스키 동상 가운데 가장 잘 만든 것 같다”고 했더니, 이곳 세미나에 왔던 학자들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며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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