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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철도와 한국의 역사(4)
이정식 / 언론인  |  webmaster@sejongeconom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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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2.08  17: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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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베리아 하바롭스크 역 구내

대대적인 애국지사 탄압으로 이어진 뮈텔의 밀고 

시베리아 횡단철도 이야기가 러일전쟁과 일제의 한국병탄,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 안명근의 안악사건과 일제가 애국지사들을 탄압하기 위해 날조한 데라우치 총독 암살사건으로 이어진다.

뮈텔의 밀고가 있고난 후 일제는 조선의 애국지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 작전에 들어간다. 명단을 들고 마구 잡아들였다. 6백여명이 검거되고 105명이 기소되어 105인 사건으로도 불렸다. 공식 사건명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이다.

어떻게 한꺼번에 6백여명을 체포했겠는가? 일제는 이 기회에 조선 독립 운동세력의 중심인 신민회를 뿌리 뽑기로 한다. 신민회 회원으로 파악돼 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체포됐다.

신민회는 1907년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안창호 선생의 발기로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이동녕, 이갑, 유동열 등 7인이 창건위원이 되어 발족한 전국적 규모의 비밀결사였다. 노백린, 이승훈, 안태국, 최광옥, 이회영, 이시영, 이상재, 윤치호, 이강, 조성환, 김구, 신채호, 박은식, 임치정, 이종호, 주진수 등 당시 애국계몽운등을 지도자들이 대부분 참여했다. 1910년 경 회원수는 약 8백명에 달했다고 한다. 신민회는 국권이 회복되면 공화정을 세우려는 목표를 세웠다.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실력양성이 중요하다고 보고 학교설림과 계몽운동 등을 펼치고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여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할 것 등도 계획하였다.

신민회원들은 설립당시 이미 일제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강점할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국권 회복과 독립운동 몸을 바칠 결의와 서약을 한 인사에 한해 회원으로 받아들였으며, 비밀의 유지를 위해 회원들도 누가 회원인지 서로 모르게 하였다.

기소되어 재판을 받은 122명은 거의 신민회원이었다. 이 가운데 105명에게 실형이 선고된 것이다. 그래서 이를 신민회 사건 또는 105인 사건이라고 한다. 공식적인 사건명은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이다. 안악 사건의 확대판인 것이다.

신민회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으로 회원들이 대대적으로 체포되면서 와해되었다. 그 와중에도 이회영 일가는 국내의 막대한 재산을 정리해 만주의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에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신흥(新興)이란 신민회가 흥국(興國)한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동안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은 일제가 한일강제합병 직후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말살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라고 오랫동안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이 사건을 조작하는데 있어 프랑스 주교의 밀고가 그럴듯한 밑그림을 그리게 해주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고 최석우 신부의 업적 

한국교회사연구소의 고 최석우 신부가 14년(1984년부터 1998년)에 걸쳐 프랑스어로 쓰여진 뮈텔주교의 일기를 번역, 공개하기 전까지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에 밀고자가 있었고, 그 밀고자가 명동성당의 천주교 주교였던 뮈텔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과거 대부분의 자료에는 “안명근이 간도지역에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황해도 신천의 민병찬과 민영설 등에게 군자금을 요구했는데, 민병찬 등이 이를 일제 헌병에게 제보함으로써 안명근이 1910년 12월 사리원에서 평양으로 가던 중 체포되었다”고 되어있다. 안명근과 함께 자금 모집을 추진하던 배경진, 박만준, 한순직, 원행섭 등도 모두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었다. 김구도 이때 체포되었다. 주로 황해도 안악지역을 중심으로 애국적 문화운동에 종사하던 인사들이었다. 여기까지는 안명근 사건 또는 안악사건이다.

그런데 뮈텔 주교의 밀고가 있은 후 안악사건은 앞서 말한 것처럼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사건으로 비화된다. 안악사건만으로는 강도죄 이상으로 죄를 키울 수 없던 차에 총독 암살음모라는 죄를 뒤집어 씌운 것이다. 즉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을 대거 잡아들이는데 있어 이같은 호재가 있을 수 없었다.

나중에 105인 가운데 99명이 무죄 석방된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주모자 급으로 5~6년 형을 받은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안태국, 임치정, 옥관빈 등 6인도 죄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 와중에 빌렘은 안명근을 면회한다. 뮈텔은 빌렘의 안명근 면회 사실도 일기에 간략히 기록했다.

2월3일(1912년)

안(安明根) 야고보를 면회한 후 빌렘 신부가 오늘 용산으로 떠났다. 그는 용산에서 제물포로 가서 집으로 돌아길 예정이다.

여기서 집이란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을 말한다. 그는 그해 9월 해주로 거쳐를 옮겼고, 여기에서 1914년 4월 프랑스로 귀국할 때가지 활동했다. 그 당시에는 인천에서 배편으로 해주로 가는 것이 빨랐던 모양이다. 

안명근은 면회를 와준 빌렘에게 감사해 했을 것이다. 그가 몰래 편지를 보냄으로써 뮈텔이 그것을 아카시에게 들고 갔고, 그 때문에 자신이 모진 고문을 받고 '총독 암살 음모를 꾸몄다'고 억지 자백을 함으로써 종신형을 받게 된 것이지만, 감옥 안에서 그같은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안명근의 몸은 고문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됐다.

안명근은 10년 만에 출옥한 후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고문과 감옥 생활로 얻은 병으로 길림성 의란현 팔호리에서 1927년 세상을 떠난다. 향년 4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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