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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열차와 한국의 역사 (3)
이정식 / 언론인  |  webmaster@sejongeconom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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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2.01  20: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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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기관차 (바이칼 호수 철도변)

조선통감부 헌병대장이 된 일본 스파이 아카시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관련한 중요한 정보 뿐 아니라 러일전쟁중 유럽에서 러시아 혁명가들과 폴란드·핀란드 등 피압박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막대한 공작금을 쓰면서 러시아의 내부를 흔들고 혁명을 부추키는 등 후방 교란 작전으로 러일전쟁 승전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스파이 아카시 모토지로가 조선에 나타났다.

아카시는 1907년 소장으로 승진돼 이토 히로부미 초대 조선통감 휘하의 헌병대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조선 주차 일본군의 참모장을 겸하며 의병탄압을 지휘했다. 수많은 우리 의병들이 일본군의 총칼에 쓰러졌다. 1910년 한일강제합병이 이뤄져 통감부가 총독부로 승격되자 그는 총독부 경무총장 겸 헌병대 사령관을 맡는다. 당시 경찰헌병의 총책이 된 것이다.

일제가 조선 반도에서 총독부를 통한 식민지배를 본격화 한지 몇 달 되지 않은 1911년 1월 11일 아카시는 조선 천주교의 수장으로 서울(당시는 경성)에 와있던 프랑스인 뮈텔(1854~1933) 주교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는다.

그런데 뮈텔이 아카시를 방문하고 돌아 간 뒤 식민지 조선에서는 애국지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광풍이 휘몰아친다. 도대체 뮈텔과 아카시 사이에 무슨 밀담이 있었던 것일까?

그 비밀이 무려 80여년 만에 밝혀졌다.

뮈텔 주교의 밀고

뮈텔 사후 65년 만인 1998년 번역되어 나온 그의 일기에서 그동안 아무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 드러났다.

다음은 1911년 1월 11일자 뮈텔의 일기다.

“빌렘 신부가 총독부에 대한 조선인들의 음모가 있었는데 거기에 안(安明根) 야고보가 적극적으로 관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편지로 알렸다. 빌렘 신부의 요청에 따라 나는 그 사실을 아카시 장군에게 알리고자 눈이 아주 많이 내리는 데도 그를 찾아 갔다.” (『뮈텔주교일기5』,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편낸이 최석우, 1998)

빌렘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당시 안중근, 안명근 일가가 다니고 있던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성당의 주임신부였다. 일기의 내용으로 보면 빌렘이 뮈텔에게 안명근을 비롯한 조선인들이 총독부를 위해하기 위해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데 이를 총독부 쪽에 알려주라는 내용 같다. 뮈텔은 이 기회에 명동성당 앞 진고개 쪽 통로 문제를 해결을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빌렘의 편지 내용을 알려주면서 아카시에게 대놓고 민원을 부탁한다. 엄청난 제보를 받았는데, 아카시가 안들어 줄 리가 있겠는가. 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이 기회를 이용해 진고개로 가는 우리의 세 통로가 막힌 사실을 알리며 중간 통로에 대한 재판이 두 번 각하되었고, 그것이 복구될 희망은 없지만 우리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겠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상고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일본 법정의 판결이 너무 대단해 보여 이 사실을 동경의 프랑스 대사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도 말하였다. 아카시 장군은 즉시 헌병대의 중위를 불러 즉석에서 다른 두 통로, 즉 양로원 길과 수녀원 정문 길을 열어 놓도록 그에게 명하였다. 장군은 나의 통고를 진심으로 감사해 하였다.”

일기를 보면 주일 프랑스 대사를 들먹였다고 쓰고 있다. 은연중 자신의 뒷 배경을 과시한다. 매우 정치적이다. 아카시는 이같은 밀고를 즉시 데라우치 총독에게 보고했다. 총독부는 조선인들의 저항의지를 말살 할 수 있는 호재를 만난 것이다. 뮈텔의 1월 12일, 1월 13일, 1월 21일의 일기를 계속 보자.

1월 12일

타카타(高田) 중위가 영국인 통역을 대동하고, 아카시 장군의 명함을 전하는 동시에 그의 이름으로 내게 감사하고, 또한 통로의 차단을 치우라고 명령이 현지에 내려졌으며 그리고 또다시 차단이 되면 중앙 경찰에 알리기만 하면 된다는 말을 전하러 왔다.

 

1월 13일

아침에 경찰관 오노(小야) 씨의 한 사무원이 내가 집에 있으면 아카시 장군이 방문 올 것임을 알리러 왔다.

경찰에서 두 직원이 조선 가톨릭의 교세 통계표를 구하러 왔다. 그들이 아직 떠나지 않고 있을 때 아카시 장군이 도착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과 총독 데라우치 장군의 이름으로 다시 감사하러 왔다고 하였다. 이야기 도중 그는 안(安明根) 야고보가 현재 청계동(淸溪洞)에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였다.

 

1월 21일

아카시 장군은 안(安明根)야고보가 빌렘에게 말했다고 하는 자백이 사실인지 여부를 빌렘 신부에게 물어 보아도 실례가 안되느냐고 편지로 물어왔다. 빌렘 신부에게 그의 부탁을 전하였다.

 

1월 13일의 일기에서 “안명근이 현재 청계동에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였다”는 대목은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 그는 전 달 즉 1910년 12월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신고를 받고 체포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안악사건이다. 청계동은 안중근 일가가 모여 살던 곳이다. 안명근이 벌써 체포되어 신문을 받고 있다고 밝힐 필요가 없기 때문에 얼버무린 것인지 모른다.

밀고의 내용이 ‘총독 암살 음모’였다면 안명근이 체포된 죄목 보다 더 큰 죄목을 붙일 수 있는 것이므로 사건을 확대 재생산 할 수 있겠다고 아카시는 생각했을 것이다. 러일전쟁중 유럽에서 러시아의 후방 교란을 위해 얼마나 대범한 스파이 활동을 했던 아카시 인가.

그리고 뮈텔의 1월 13일자 일기를 보면 아카시 편지의 내용은, 안명근이 빌렘에게 한 말을 총독부가 빌렘에게 직접 확인하겠다는 얘기다.

신부에게 자백했다면 고백성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안명근은 빌렘 신부에게 어떤 고백을 했을까? 정말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고 한다는 그런 고백을 했을까? 그렇게 순진했을까? 신부를 너무 믿었던 것은 아닐까? 여러번 생각해 봐도 안명근이 빌렘에게 총독을 암살하겠다고 고백했을 것 같지는 않다.

만약에 안명근이 정말 그렇게 말했다면, 빌렘이나 뮈텔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속으로 이렇게 변명했을 것이다.

“살인은 막아야 할 것 아닌가?”

추측이지만, 안명근이 “데라우치를 죽이고 싶다” 정도로 이야기 한 것이 외국인인 빌렘 신부에게 잘 못 해석되어 그런식의 밀고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말의 “죽이고 싶다”와 “죽이겠다”는 뉘앙스가 다르지만 외국인들은 자칫 같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1889년 2월 조선에 와 이미 20년 이상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말을 익혔을텐데 그런 오해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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