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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A]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한국의 역사
이정식 / 언론인  |  webmaster@sejongeconom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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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1.30  16: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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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센스>가 후원하고 바이칼 BK투어가 주관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가는 겨울 바이칼 호수’ 여행이 2019년 2월 8일부터 15일까지 7박 8일간 실시된다. 이 여행과 관련해,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한국의 역사’를 Q & A 로 싣는다. 

Q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우리나라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떤 연관성을 이야기하는 것인가요?

결론부터 말하면, 시베리아 횡단열차 때문에 1904년 2월, 일본이 러시아를 기습공격해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러시아가 일본에 져서,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는 그런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한반도 주변정세를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19세기 말엽, 일본과 러시아는 조선반도와 중국의 만주지역(현재의 요녕, 길림, 흑룡강 등 동북 3개 성과 내몽골 동부)을 서로 탐내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조선과의 강화도 조약(1876년) 이후 조선 병탄과 대륙 진출의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고, 러시아 역시 동아시아에서의 부동항 확보를 위해 남하정책을 추진하면서 만주 땅과 조선반도를 집요하게 노렸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러-일 두 나라의 싱강이는 계속됐습니다.

마침내 두 나라는 1903년 협상테이블에 앉아 위의 문제들을 논의합니다. 일본은 만주에서의 러시아의 우위를 인정하는 대신 조선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하라고 러시아에 요구했습니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조선반도의 평양과 원산을 잇는 39도선의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일본이 나누어 지배하는 안을 제시했구요. 오늘날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져있지만, 이미 100년도 더 전에 러일 간에 39도선 분할 논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은 이같은 러시아의 39도선 분할 지배 제안은 일본에 불리한 것이라고 보고 거부합니다. 러일 간의 관계는 점점 전쟁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치달아갔습니다.

이러한 때에 주 러시아 일본 대사관의 무관인 아카시 모토지로(1864~1919) 대령으로부터 온 비밀 전문은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완공될 때까지는 개전을 어떻게든 미루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말해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완공되어야 전쟁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고있다는 얘기였습니다. 병력과 장비의 수송을 감안할 때 러시아측의 그러한 판단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1891년부터 시작된 모스크바-블라디보스트크 간의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중간지점인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구간이 난공사 구간이어서 그때까지 연결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공사 진척도로 보아 완공은 1905년 10월에야 가능했습니다.

일본은 아카시의 정보 보고를 토대로 마침내 1904년 2월, 어전회의에서 개전을 결정합니다. 개전을 결정하게 된 데는 1902년 영국과 체결한 영일동맹이 매우 중요한 배경이 되었음은 물론입니다. 2월 8일, 일본은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에 대해 선제공격을 가했습니다.

Q 러시아는 일본이 선제공격을 해오라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던데?

러시아는 일본이 감히 대국인 러시아를 선제공격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허를 찔린 것이지요. 러시아는 육지에서도 바다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발틱함대의 해전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지만, 발틱함대 마저 1905년 5월 말, 쓰시마 해전에서 전멸되다시피 했습니다. 러시아는 1905년 1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 (* 평화적인 시위대를 황제의 근위대가 총칼로 진압해 수천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 이후 국내의 정치 상황마저 날로 악화되고 있어 일본과 강화조약에 나설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독도의 동도와 서도(오른쪽)

Q 독도도 러일전쟁 때 일본이 점령한 것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해전을 치루기 위해 동해의 한가운데 있는 독도에 러시아 함대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해 망루를 설치했습니다. 그러고는 1905년 1월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키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주인인 없는 땅이라는게 편입의 이유였습니다.

일본이 정말 그 섬의 주인이 누구인지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일본은 그것이 조선의 땅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지도에도 그렇게 표시해왔습니다. 일본의 독도 편입은 본격적인 조선 침탈의 서막이었습니다.

Q 러일전쟁 때 대한제국(조선)은 어떤 입장을 취했나요?

러일전쟁 발발 직전, 대한제국은 전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대한제국을 겁박해, 전쟁 수행을 위해 한반도 안의 토지를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한일의정서’를 체결합니다. 의정서 속에는 ‘일본은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는 내용도 있으나, 이는 대한제국의 협력에 명분을 주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속임수임은 곧 드러났습니다.

러일전쟁 승리 후 일본은 두 달 만인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습니다. 그 뒤 1907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킨 다음 1910년 한일강제합병으로 한반도를 일제의 식민지로 만듭니다.

Q 만약에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겼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러일전쟁이 무승부로 끝났다면 모를까, -전쟁에서 무승부란 역사에 거의 없지만, 러시아가 이겼다면 러시아의 속국이 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러시아 혁명후 소련의 위성국가가 됐을지 모릅니다. 러시아는 우리나라에 그들이 사용할 부동항을 대대적으로 건설했을 것이고, 일본의 운명 또한 어찌됐을지 알 수 없습니다.

   
옛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기관차 

Q 러일전쟁 전에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관련한 러시아측 동향을 탐지해 본국으로 보고했던 러시아 주재 일본 대사관의 무관 아카시 모토지로 대령이 그 후 조선총독부의 초대 헌병 사령관이 되어 우리 독립지사들을 탄압한 인물이라는데?

아카시 모토지로는 일본의 전설적인 스파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관련한 정보뿐만 아니라 본국으로부터 엄청난 공작금을 받아, 레닌을 비롯한 러시아 내외의 혁명세력등 을 지원하며 러시아 내부의 교란과 소요를 유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카시는 러일전쟁이 끝난 후 귀국했다가 1907년 소장으로 승진해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통감부에 헌병대장으로 부임합니다. 그는 조선 주차 일본군의 참모장을 겸하며 의병탄압을 지휘했습니다. 당시 수많은 의병들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됐습니다. 1910년 한일강제합병이 이뤄져 통감부가 총독부로 승격되자 그는 총독부 경무총장 겸 헌병대 사령관을 맡습니다. 말하자면 식민지 초기 헌병경찰 총책이 된 것입니다. 그가 헌병경찰 총책으로 있는 동안 안중근 의사 사촌동생 안명근이 연루된 안악사건, 신민회 사건, 105인 사건 등을 통해 600명이 넘는 우리나라의 애국지사들이 체포, 구금되고 고문을 당하다 죽기도 하는 등 모진 탄압을 당합니다. 그는 조선총독부를 떠난 후 1918년 대장으로 승진, 대만 총독에 임명됐다가 이듬해인 1919년 사망합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관련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러일전쟁은 이렇게 우리 역사의 뼈아픈 대목인 일제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와 얽혀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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