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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열차와 한국의 역사 (2)일본, 시베리아 횡단열차 완공 전 선제공격이 유리하다고 판단
이정식 / 언론인  |  webmaster@sejongeconom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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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1.25  12:3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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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일전쟁 때 바이칼 호수위에 놓은 열차레일위의 화차를 말들이 끌고 있다.

20세기 초, 만주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와의 일전을 각오하고 있던 일본은 마침내 1904년 2월 어전회의에서 개전을 결정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완공되어 러시아의 병력과 장비의 수송이 원활해지기 전에 선제공격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에 이르렀던 것이다. 개전을 결정하게 된 데는 1902년 영국과 체결한 영일동맹이 중요한 배경이 된 것 또한 사실이다.

러시아의 극동에서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고자했던 영국이 일본의 동맹국이 되었다는 것은 일본으로서는 커다란 외교적 성과였다. 영국은 더 없이 든든한 배후가 되었던 것이다. 뒤에 더 이야기하겠지만, 당시 세계 최강으로 일컬어지던 러시아의 박틱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함대에 전멸되다시피 한 것은 발트해를 출발해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전쟁터인 극동으로 7달 동안 이동하는 동안 영국의 끊임없는 방해에 시달린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일본이 영국으로부터 함대의 이동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았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일본함대는 1904년 2월 8일 여순항에 정박중이던 러시아 함대 (정식 명칭은 태평양 함대, 또는 극동함대. 여순과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의 통칭)에 선제공격을 가했다. 야음을 틈탄 어뢰공격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일본이 감히 러시아를 선제공격하지 못하리라고 보았다.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누군가가 ‘러일간에 전쟁이 있을 것인가’ 하고 묻자,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내가(니콜라이 2세가) 전쟁할 생각을 하지 않는 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만큼 러시아는 일본을 얕잡아 보았던 것이다.

일본이 개전 초기에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선제 공격한 이유는 러시아 함대를 우선적으로 무력화 시켜야 해상을 통한 육군병력의 수송이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러시아 군함이 황해에서 움직인다면 일본 육군은 수송도중 러시아 군함에 의해 침몰 당할 우려가 높아 전쟁터인 요동반도에 상륙도 하기 전에 전멸 당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궤멸시키지 못한다면 최소한 여순항에 묶어 놓아야 했다. 일본 함대는 선제공격과 더불어 여순항 봉쇄에 들어갔다. 당시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주력함들은 거의 여순항에 와 있었다.

   
▲ 20시기 초, 바이칼 호수 위에서 시베리아 횓단열차를 실어 날랐던 열차페리 '바이칼호'

바이칼 호수의 얼음위에 열차 레일을 깔다

일본의 공격으로 전쟁이 터지자 러시아는 당황했다. 병력과 전쟁 물자를 극동까지 신속하게 실어날라야 하는데, 횡단열차의 바이칼 구간이 아직 완공이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원활한 수송이 어려웠다.

당시 시베리아 횡단철로는 모스크바에서 바이칼 호수에 면한 포트 바이칼 역까지는 1899년에 이미 완공이 돼있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포트 바이칼 건너편쪽 탄호이까지도 철로가 연결되어있었다. 다만 그 사이의 환 바이칼 구간, 즉 포트 바이칼 역에서부터 시작되는 호수에 면한 부분이 절벽과 계곡 등으로 되어있어 공사가 여려웠다. 교량과 터널 등 400여개의 구조물을 만들어야 했다. 공사비도 다른 곳에 비해 2.5배 가량 들었다.

다급해진 러시아는 꽁꽁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 위에 열차 레일을 깔았다. 포트 바이칼에서 부터 기관차, 객차, 화차를 각각 분리해 말로 끌었다. 3천필의 말이 동원되었다. 그렇게 1904년 2월 28일부터 3월 25일까지 약 한달 가까이 기상천외한 수송 작전을 펼쳤다. 포트 바이칼 역에 있는 조그만 포트 바이칼 박물관에는 당시 말이 끄는 화차와 바이칼 호수의 얼음에 빠진 기관차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전까지 몇년간 여름철에는 열차를 배 안에 넣고 운행할 수 있는 열차페리(바이칼호)를 이용했고, 겨울철에는 열차의 사람과 화물을 말썰매에 옮겨 싣고 호수의 얼음을 건넌 뒤 건너편에서 다시 기차에 싣는 방식으로 수송했었다.

1905년부터는 수송이 다소 원활해 졌던 모양이다. 종전 무렵 일본측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통해 러시아측이 하루 약 2천명의 병력을 수송할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100일이면 20만명의 병력이 증원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것 역시 장기전을 펼칠 경우 일본에 유리하지 않다고 본 이유 중 하나이다.

203고지 점령후, 러시아 함대 궤멸돼

요동반도에 상륙한 일본 육군은 러시아 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초기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승기를 잡기 못했다. 그 가운데 여순항을 내려다 보는 203고지 공격에 나섰던 노기 마레스께 대장이 이끄는 제3군의 희생이 가장 컷다. 노기의 두 아들도 러일전쟁 때 전사했는데, 큰 아들은 먼저 전사했고, 들째 아들은 203고지 전투에서 사망했다.

지금도 203고지(중국명 이령산)에 가보면 203 고지 공방에서 일본군이 1만명, 러시아군 5천명이 사망했다고 적혀있다. 실제는 그 이상이었다.

일본의 전쟁 지휘부는 203고지 작전에서 노기의 부대가 무모한 돌격작전으로 너무 많은 희생자를 내자 노기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다. 그러나 메이지 일왕의 반대로 노기는 자리를 지켰다. 노기는 마침내 1905년 1월 초, 203 고지를 점령했다. 여순항을 내려다 볼 수 있는 203고지 점령은 여순항에 정박해 있는 러시아 함정들에 대한 포병의 공격을 가능하게 했다. 러시아 함대는 일본 육군의 포격으로 일순간 궤멸되고 말았다.

러시아는 당초 발틱 함대를 발진시킬 때 극동함대와 힘을 합쳐 일본함대를 쳐부순다는 전략이었으나 발틱함대가 항진하는 사이 극동함대가 궤멸되는 상황이 되었으니 발틱함대는 단독으로 일본 함대와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 사이 육전에서마저 봉천 회전에서 예상과 달리 일본군이 승리함으로써 전세는 러시아에 날로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발틱함대가 일본함대를 제압할 경우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킬 여지는 남아 있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일본은 병력의 손실도 손실이거니와 전비가 점차 고갈 됨으로써 전쟁을 속히 끝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동맹국인 영국의 지원과 미국의 은밀한 지원이 있었지만, 전쟁이 장기화 할 경우 최종적인 승리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베트남 해역에 머물고 있던 발틱함대가 점점 일본열도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의 일본이 취할 수 잇는 최선의 전략은 발틱함대를 궤멸시킨 후 강화협상에 임하는 것이었다.

하룻만에 무너진 발틱함대

발틱함대는 45척의 각종 함정을 거느린 세계 최강의 함대였으나 일본의 전쟁터까지 오는데 7달이라는 너무 긴 세월을 바다위에서 보내는 바람이 환자들이 속출했고, 수병들은 사기가 매우 저하되어 있었다.

당시의 군함은 석탄이 연료였다. 발틱함대의 항로에는 영국의 식민지가 많았으나 영국의 식민지 항구에서는 영국의 동맹국인 일본을 치러가는 러시아 함대의 기항과 선탄 선적 등을 거부했다. 심지어 러시아의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조차 발틱함대는 푸대접을 받다가 겨우 석탄과 식량을 보충하고 출발할 수 있었다.

1904년 10월 19일 발틱해를 출발한 함대는 1905년 5월 하순에야 일본 열도 인근에 도착했다.

일본의 해군은 연초에 뤼순의 러시아 함대가 궤멸됨에 따라 본국에 돌아와 함정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쓰시마 해역에서 일전을 치루고자 기다리고 있었다. 발틱함대가 쓰시마쪽으로 오지 않고 태평양쪽으로 돌아 블라디보스크토크로 도망하는 경우에도 대비했다.

예상했던대로 발틱함대는 쓰시마 해역으로 들어왔고 해전은 5월 27일 시작되었다. 양측의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으나, 러시아 측이 역부족이었다. 만 하룻만에 발틱함대는 일본함대에 궤멸되고 말았다.

박틱함대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러시아 함정 중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달아난 함정은 3척이었고, 나머지는 침몰, 항복, 제3국으로 도망 등 참담했다. 발틱함대의 침몰은 러시아의 결정적 패배였다.

대국을 자처하던 러시아는 패전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05년 1월에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국내의 정정이 날로 불안해지고 있어 전쟁을 속히 마쳐야 할 상황이었다.

전쟁 초기에는 러일전쟁이 러시아 국내의 불만세력을 잠재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란 것이 차르 측근들의 생각이었으나 연이은 패전 소식은 오히려 국내의 불안을 키웠다.

거액의 공작금을 뿌린 아카시

러시아 국내의 소요와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염전(전쟁 혐오) 분위기는 일본 스파이 아카시 모토지로가 수행한 공작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아카시 모토지로는 대본영에서 보내온 막대한 공작금을 러시아 혁명세력과 러시아로 부터의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폴란드와 핀란드 등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제공했다. 아카시는 레닌도 만났다. 레닌은 처음에는 아카시의 자금 지원 제의를 거절했으나 후에는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아카시는 피의 일요일 때 대중을 이끈 가폰 신부, 문학가 고리키, 핀란드 독립운동가 실리아쿠스 등과도 접촉했다.

수치로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아카시가 공작금을 뿌린 이후 러시아 내에서의 각종 시위 등 소요가 늘어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카시가 뿌린 공작금은 1백만엔으로 당시 일본 1년 예산 2억 5천만엔의 1/250에 이르는 거액이었다. 현재의 한화로 약 5천억원, 또는 1조원 가량이라고 셈하는 이도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아카시의 활동에 대해 ‘일본군 10개 사단에 맞먹는 역할을 한 것’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아무튼 쓰시마 해전 후, 러일 양국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포츠머스 강화회담을 통해 1905년 9월 전쟁을 끝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전쟁에서는 청일전쟁 때와는 달리 배상금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요동반도를 다시 빼앗았고, 사할린 남부를 차지했으며, 조선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미일 양국이 각각 일본은 조선을,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는 데 대해 양해하기로 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것은 러일전쟁이 끝나기 전인 그해 7월이었다.

그 결과 러일전쟁이 끝난 두달후인 1905년 11월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다. 그리고 1907년의 헤이그 밀사 사건에 이른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 1910년 한일강제합병 등의 과정을 거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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