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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러시아 문학기행 - 시베리아 노보쿠즈네츠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을 찾아서도스토옙스키가 첫 결혼을 한 곳
이정식 / 언론인  |  nocut20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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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7.29  18:4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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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보쿠즈네츠크로 가던 중 열차가 잠시 정차했을 때 승무원들과 함께. 왼쪽이 이정식 작가

한국보다 10도 가량 낮은 시베리아의 여름 

2018년 7월 18일부터 며칠 휴가를 내어 시베리아 노보쿠즈네츠크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을 찾아갔다. 우리나라가 폭염으로 펄펄 끓고 있을 때였다. 시베리아의 기온은 서울 보다 10도 가량 낮았다. 아침기온이 17~18도, 낮 기온은 23~24도 정도였다.

시베리아의 외딴 도시 노보쿠즈네츠크에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이 있는 이유는 이곳이 도스토옙스키가 미친 듯 사랑했던 마리야를 찾아와 결혼을 한 기념비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인구 2~3천명 정도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었다. 이름도 쿠즈네츠크였는데 20세기에 스탈린스크로 개명했다가 스탈린이 죽고 나서 다시 노보쿠즈네츠크로 바뀌었다.

노보쿠즈네츠크는 시베리아 중심도시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동남쪽으로 380km 떨어져있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가야하는데 교통이 다소 불편했다. 비행기, 버스, 대절 택시 등을 고려하다가 결국 기차로 다녀오기로 했다.

교통편 예약 등은 지난해 옴스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 갈 때처럼 전 부랴트 자치공화국 외무장관을 지낸 김준길 교수가 수고해 주었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노보쿠즈네츠크로 오가는 기차도 시간이 영 좋지 않았다. 가는 열차는 내가 도착한 다음날인 19일 새벽 5시 출발로 되어있었다. 7시간 후인 낮 12시 노보쿠즈네츠크 도착이다. 돌아올 때는 같은 날 밤 8시반에 노보쿠즈네츠크를 출발해 새벽 3시에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한다. 갈 때와 올 때 걸리는 시간이 30분 가량 차이가 났다. 기차 타는 시간만 왕복 13시간 30분이다.

이번 여행에는 김준길 교수의 대학 후배인 사비에르 벨리예브 박사가 동행했다. 학자이며 사업가이기도 한 그는 오랜만에 고향도 방문할 겸 이 여행의 안내를 자처했다고 했다. 기차안에서 나와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가 스탈린에 대해 비교적 지지하는 입장을 보여 나는 속으로 조금 놀랬다. 러시아에서는 스탈린이 소련을 강하게 이끌었다며 그를 옹호하는 사람이 아직도 30% 정도는 된다고 한다.

   
▲ 노보쿠즈네츠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 있는 마리야 그림

노보쿠즈네츠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노보쿠즈네츠크역은 에메랄드 빛인 노보시비르스크역이나 옴스크역 등과 달리 노랗고 빨간 기둥에 연분홍 지붕의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역 바로 옆에는 노보시비르스크의 대표적 상징물 중 하나이기도 한 황금 돔의 미니 성당 차스브냐를 닮은 작은 성당이 눈길을 끌었다. 역에서 택시를 타고 박물관으로 직행했다. 박물관에는 김준길 교수가 사전에 우리의 방문 일정을 알려 놓았기 때문에 직원들이 반갑게 일행을 맞아주었다.

박물관은 마리야 가족이 방 하나를 세들어 살던 통나무집을 개조한 것이다. 시베리아에서 흔히 보는 가옥이다. 하급 세무관리였던 마리야의 남편 이사예프는 세미팔라친스크에서 이곳으로 전근간지 석달만인 1855년 8월에 죽었다. 알콜중독자였던 그는 빚만 남긴 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떴다. 마리야는 이 집에서 어린 아들 파벨을 데리고 1857년 2월 도스토옙스키와 결혼할 때까지 살았다.

집의 내부는 십(十)자로 네 부분으로 나뉘어진 구조였다. 이 가운에 안쪽의 방 한 칸이 마리야 가족이 살던 공간이었다.

안내를 해준 까쩨리나 양은 자신이 이곳에서 일한지 7년이 되는데 그 이전에 한국인이 다녀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은 한국인을 처음 본다고 했다.

   
▲ 해설사 까쩨리나 양

나는 설명을 듣다가, 까쩨리나 양에게 “도스토옙스키가 마리야를 처음에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도스토옙스키가 세미팔라친스크에서 사병 신분임에도 마리야 아들의 가정교사로 그집에 드나들다가 마리야와 애정관계에 빠지게 되었다는 일부 기록(고바야시 히데오의 ‘도스토옙스키의 생활’ 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병영생활을 하는 사병이 가정교사를 하러 민간인집에 드나들었다는 이야기는 정황상 맞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까쩨리나 양은 도스토옙스키가 가정교사를 했던 것은 아니며, 벨레호프란 장교의 소개로 이사예프 부부를 알게 된 것이 마리야를 사귀게 된 계기였다고 했다.

마리야보다는 도스토옙스키쪽에서 먼저 후끈 달아올랐다. 그러던 중 이사예프가 세미팔라친스크에서 동북쪽으로 6백킬로나 떨어진 쿠즈네츠크로 전근을 가게되어 가족이 이사를 하게 되자, 도스토옙스키는 충격을 받고 어쩔줄 몰라하며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는 브랑겔 남작의 회상록에 나온다. 마리야는 체념하는 듯 했다고 한다.

마리야가 떠나자 도스토옙스키는 잠도 잘 못자고 음식도 잘 먹지 않아 체중도 줄어들었다. 노상 초조한 모습으로 담배만 빨아대며 지냈다.

마리야가 떠난 후 유령처럼 변한 도스토옙스키

브랑겔 남작은 마리야가 떠난 후 낙담하여 사람이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몸도 쇠약해져 유형처럼 변한 도스토옙스키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가 마리야를 한번 만나기라도 하면 불행한 상태가 나아질까하여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하기로 하고 작전을 짰다.

처음에는 도스토옙스키에게 지사와 연대장에게 세미팔라친스크와 쿠즈네츠크의 중간쯤에 있는 즈미예브(현재의 지명은 지메이노고르스크)까지 다녀올 수 있도록 탄원을 하도록 했으나 두 번이나 거부되었다. 결국 모험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브랑겔 남작은 도스토옙스키가 간질 발작을 몇 번이나 일으켜 아파 누워있다는 소문을 온 마을에 퍼뜨렸다. 당시 세미팔라친스크의 인구는 2~3천여명에 불과했으므로 소문은 금방 퍼졌다. 도스토옙스키는 연대장에게 군의관 라못테에게 치료를 받고 있다고 보고하는 한편으로 쿠즈네츠크로 마리야에게 편지를 보내 그녀에게 즈미예브에서 만나자고 했다. 군의관 라못테는 폴란드 출신인데 그도 정치적인 처벌로 세미팔라친스크에 와 있었다. 즈미예브 상봉 계획도 실은 군의관의 아이디어였다고 브랑겔은 후에 술회했다.

어느날 해가 진 후 밤 10시쯤 도스토옙스키와 브랑겔은 몰래 마차를 타고 세미팔라친스크를 떠났다. 마부에게 마차를 전속력으로 몰도록 했다. 마차는 최대 속도로 달렸으나 맘이 급했던 도스토옙스키는 줄곧 마부에게 더 빨리 달려달라고 재촉했다. 마침내 즈미예브에 도착했으나 마리야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녀로부터 남편의 병세가 중하고 여비가 없어 오지 못한다는 편지가 도착해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크게 실망했다. 브랑겔은 실망해 넋을 잃고 있는 도스토옙스키를 위로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날 두 사람은 다시 3백킬로미터를 28시간 만에 달려 세미팔라친스크로 돌아왔다. 아무도 그들의 행적을 알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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