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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러시아 문학기행 : 도스토옙스키, 두번째 부인 안나의 결단으로 유럽으로 떠나다- 빚쟁이와 친척들을 피해 떠난 사실상의 도피여행
이정식 / 언론인  |  nocut20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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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7.09  16:4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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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스크바의 도스토옙스키 생가. 도스토옙스키는 이곳에서 1821년 11월 11일 태어났다. 도스토옙스키 가족은 이 건물 1층 일부에서 살았다.

도스토옙스키 포도주를 끊다

안나(두번째 부인)와의 결혼 후 최초의 간질발작, 그것도 연달아 일어난 이중 발작은 도스토옙스키가 친척집에 다니면서 마신 샴페인이 원인이었다. 그것이 극도의 흥분을 일으켰던 것임을 나중에 알게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후 포도주를 절대로 마시지 않았다. 그후에도 간질 발작 증세는 때때로 계속 됐지만, 이날의 이중 발작은 매우 격렬했던 것 같다. 안나가 처음 겪은 일이기도 했지만... 안나는 회고록에 “그날의 이중발작은 내게는 영원히 괴로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기록했다.

안나를 괴롭힌 친척들

도스토옙스키의 신혼집은 미망인이 된 도스토옙스키 형수 에밀리야 페도로브나가 조카들과 살고 있는 집과 5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이 때문에 형수와 조카들이 노상 그 집엘 드나들었다. 남동생 니콜라이, 여동생 알렉산드라도 자주 찾아왔다. 이들은 점심을 먹은 후 밤 10시 11시까지도 돌아가지 않는 날이 많았다. 또한 문인 손님들의 방문도 잦았다.

그런 가운데 에밀리야 페도로브나는 처음보다 안나에 대한 태도가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살림살이에 대한 충고를 한다면서 늘 안나를 가르치려고 했을 뿐 아니라 번번이 도스토옙스키 첫 부인 마리야의 예를 들먹여 안나를 불쾌하게 했다. 첫 부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려없는 짓이었다. 안나는 회고록에 에밀리야는 “착하긴하지만 생각이 얕은 여자였다”고 썼다.

결혼 초기 안나는 매일 같이 찾아 오는 친척, 어린 조카들과 손님들을 접대하는데 하루 하루를 보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의붓아들 파벨은 거친 언행으로 안나를 괴롭혔다. 파벨은 모친인 마리야가 사망한 후 이런 저런 집안일들을 처리해 왔는데, 도스토옙스키가 재혼을 하자 안나에게 안주인 역할을 빼앗긴 것으로 생각하고 자주 안나를 골탕먹이려고 했다. 파벨은 도스토옙스키의 면전에서는 안나에게 공손한 태도를 취했으나 도스토옙스키가 없을 때는 안나를 거친 말과 태도로 대했다. 파벨은 안나에게 도스토옙스키가 그녀와 결혼한 것은 ‘대단히 멍청한 짓’이었으며, 안나가 ‘엉터리 주부’이고, ‘우리 모두의 돈’을 헤프게 쓰고 있다면서 결혼 후 도스토옙스키의 발작이 심해졌는데 이는 안나의 책임이라고 폭언을 해대기도 했다.

그런데다가 어느날 도스토옙스키는 파벨에게 무슨말을 들었는지 “파벨에게 상처를 주지 말라”고 안나에게 말하기도 했다. 안나는 파벨이 자신을 중상모략한다고 생각했다. 도스토옙스키는 파벨의 행태를 알지 못하거나 모르는 척 하는 것 같았다. 자기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의붓 아들을 보호하려는 도스토옙스키의 태도를 안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안나는 “그 사이 도스토옙스키의 사랑이 식었나” , “이러다가 결혼 생활이 비극적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하는 우려를 하기 시작했다.

안나의 결단으로 이뤄진 유럽행

어느날 집으로 돌아 온 도스토옙스키는 설움에 복받쳐 엉엉 우는 안나를 보게 되었다. 파벨로부터 폭언을 들은 날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비로소 의붓 아들의 폭언과 친척들의 일로 안나가 몹시 힘들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안나에게 잡지사로부터 선금을 받아 해외에 몇 달 다녀오자고 제의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통보>와 장차 보낼 자신의 작품의 선금을 교섭했다. <러시아 통보>는 도스토옙스키에게 1천 루블을 지급하기로 했다.

도스토옙스키가 해외로 나갈것이라고 선언하자, 친척들은 모두 반대한다면서 몇 달치 살림 비용을 미리 달라고 요구했다.

친척들의 살림 비용, 급히 갚아야 할 빚 등을 계산해보니 1천4백 루블이 당장 필요했다. 선금 1천 루블로는 도저히 여행을 떠날 비용을 마련할 수 없었다. 최소한 2천 루블은 있어야 해결될 상황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여행 계획이 무산되게 된데 대해 안타까워했다. 그는 안나에게 미안해 하며 가을까지 몇 달 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희망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듯 했던 그때 문득 안나의 머릿 속에 “내 지참금과 물건들을 모두 여행을 위해 내어 놓으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나의 행복을 구하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안나는 친정으로가 어머니를 설득했다. 어머니는 딸의 행복을 위해 그녀의 청을 받아드렸다. 결혼할 때 가져온 패물과 가구, 모피옷 등을 팔거나 전당포에 저당잡히고 돈을 마련하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 온 안나는 남편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남편을 따라 나와 강변도로를 함께 걸으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안나의 물건들을 희생하면서까지 해외여행을 갈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친척들과 빚쟁이로부터의 도피

안나는 남편에게 “살기 힘들다”고 고백하면서 “두세 달이라도 평온하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또한 “지금 상황으로는 예전에 꿈꿨던 것처럼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없을뿐더러 어쩌면 영원히 갈라서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안나는 남편에게 “우리의 사랑과 행복을 지켜달라”고 간청하다가 자제력을 읽고 울기 시작했다.

안나가 울기 시작하자 도스토옙스키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안나를 달래기 위해 황급히 모든 것을 안나의 뜻대로 하자고 했다. 안나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행인들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도스토옙스키를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형수와 의붓아들이 요구하는 돈을 일부 주고 나머지 부족분은 물건들을 처분한 뒤 장모를 통해 주기로 하고 남은 물건들은 여기저기에 맡겼다. 그리고 마침내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유럽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결혼 약 두 달 후인 4월 14일이었다. 당초엔 신혼여행을 빙자해 석달 예정으로 떠났지만, 그들은 4년 후에야 러시아로 돌아왔다. 안나가 친척과 의붓아들 때문에 러시아로 돌아가기 싫어한 것도 해외 체류가 길어진 이유였다. 물론 빚쟁이들로부터의 도피도 또다른 중요한 이유이다. 당시 도스토옙스키가 갚아야 할 빚은 2만 루블에 달했다. 모피코트가 25루블, 교사의 1년 연봉이 1천루블쯤 할 때다. 해외로 나가 두 사람은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 모스크바 레닌국립도서관 앞의 도스토옙스키 동상
   
▲ 도스토옙스키의 두번째 부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그림을 좋아했던 도스토옙스키

그러나 유럽 생활은 고단했다. 늘 돈에 쪼들렸기 때문이다. <러시아 통보> 등에서 부쳐주는 원고료로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베를린에서 시작해 드레스덴, 바젤, 제네바, 바덴-바덴, 베베,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볼로냐, 빈, 프라하 등을 전전했다.

그림을 좋아했던 도스토옙스키는 가는 곳 마다 미술관을 찾았다. 이런 곳에 갈 때는 물론 안나와 함께였다. 도스토옙스키는 특히 드레스덴 미술관에 있는 라페엘로의 작품 ‘시스티나의 성모’를 좋아했다. 그는 이 작품이야말로 인간의 천재성이 가장 잘 발휘된 작품이라며 언제나 경탄해 마지 않았다.

현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이 되어있는, 그가 숨을 거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집 서재에는 이 작품의 복제품이 걸려있다. 생전에 누군가로부터 선물받은 것이다. 전체 그림을 온전히 복제한 것이 아니라 마리야가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윗 부분만을 복제한 것이다. 2018년 5월 필자가 카자흐스탄 세메이의 도스토옙스키 문학박물관에 갔을 때도 이 복제 그림이 도스토옙스키와 안나의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또 그가 깊은 인상을 받은 그림은 바젤 미술관에 있는 한스 홀바인의 종교화 ‘그리스도의 시신’이다. 안나는 바젤 미술관에 함께 갔을 때 이 그림을 보았다. 십자가에서 숨진 뒤 끌려 내려와 썩도록 방치된 참혹한 예수의 모습을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안나는 마침 임신 중이어서 이 그림을 오래 보지 않으려고 다른 전시실로 갔는데, 15분인가 20분쯤 후에 돌아와 보니 도스토옙스키가 여전히 그곳에 붙박힌 듯 서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흥분된 얼굴에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스토옙스키가 간질 발작을 시작되는 순간 안나가 여러 번 본 표정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남편의 팔을 잡고 그를 다른 전시실로 데리고 가 의자에 앉혔다. 이날 다행히도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별실에는 ‘그리스도의 시신’ 복제화도 걸려있다.

첫 딸을 잃고 실의에 빠지다

1868년 2월, 제네바에서 안나가 첫 딸 소냐(소피야)를 낳았다. 도스토옙스키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의 나이 47세에 얻은 첫 아이였다.

길눈이 어두웠던 도스토옙스키는 소냐가 태어나기 전 산파가 사는 집이 산비탈에 모양이 비슷비슷한 거리들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고는 산파 집으로 가는 길을 익히기 위해 3주간이나 그 동네로 산책을 다녔다. 밤중에 갑자기 부르러 갈 있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집을 잘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처럼 간절히 기다리던 아이였으나 소냐는 백일을 넘기지 못하고 감기로 죽고 말았다.

유모차를 끌고 산책 도중 갑자기 날씨가 변해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소냐가 감기에 걸렸다. 유명한 소아과 의사를 불렀고, 의사는 아이가 죽기 세 시간 전까지도 상태가 훨씬 좋아졌다고 했으나 소냐는 갑자기 숨을 거뒀다.

첫 부인 마리야와의 사이에 자식을 두지 못했던 도스토옙스키는 자식을 갖는 일이야 말로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그런데 첫 아이를 이처럼 잃었으니 슬픔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소냐를 뭍은 후 낙담한 부부는 제네바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더욱이 소냐가 죽었을 때 주위의 스위스 사람들이 보여 준 박정한 태도도 이 곳에 정나미가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웃들은 소냐가 죽은 후 안나가 소리내어 울자, ‘신경에 거슬리니 큰소리로 울지 않도록 해달라’고 사람을 보냈다.
부부는 제네바를 떠나 스위스의 호반도시 베베로 이주해 슬픈 여름을 보낸 후 9월 초에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옮겨간다. 밀라노에서 두 달을 지낸 후 부부는 도스토옙스키가 미술품들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던 피렌체로 이사했다.

다음해 1869년 이탈리아에서 사는 동안 다시 아이가 생겼다. 안나는 이탈리아어를 조금 할 줄 알았으나 도스토옙스키는 이탈리아어를 몰랐다. 안나의 출산을 위해 도스토옙스키가 산파나 의사 등과 이야기 할 수 있는 불어나 독일어가 통하는 곳으로 이주해야할 필요가 생겼다.

부부는 1869년 8월 이탈리아에서 다시 익숙한 도시인 드레스덴으로 이주했다. 1869년 9월 둘째 딸 류보피가 태어났다. 부부는 두 번째도 딸이 태어나길 간절히 바랬다. 그래서 이름도 ‘사랑’이라는 뜻인 ‘류보피’로 정해두었었다.

전쟁과 평화』를 감추다

안나가 류보피를 임신하고 있을 때 이런 일도 있었다.

비평가 스트라호프가 러시아에서 레프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출판했다며 이 소설 한 질을 보내주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소설을 읽다보니 그 내용 중에 주인공 안드레이 발콘스키의 아내가 아기를 낳다가 죽는 장면이 나왔다.

안나도 도스토옙스키가 먼저 읽은 이 소설을 따라 읽고 있었는데, 도스토옙스키는 임신중인 안나가 이 부분을 읽는 것이 심적으로 좋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그 대목이 들어있는 한권을 감췄다.

안나가 소설을 읽다보니 한권이 없었다. 없어진 한 권을 찾기 위해 온 데를 다 뒤졌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아까운 한 권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안내가 류보피를 무사히 낳은 후 안나에게 그 책을 내주었다.

류보피가 태어난 후 도스토옙스키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스트라호프에게 이렇게 기쁨에 넘친 편지를 썼다고 안나는 회고록에서 밝혔다.

“아, 존경하는 니콜라이 니콜라이비치 (스트라호프). 자네는 왜 결혼을 하지 않았나. 왜 아기가 없단 말인가. 자네에게 맹세컨대, 인생의 행복 중 4분의 3이 거기에 있다네. 나머지 다른 것들엔 겨우 4분의 1이 있을 뿐이지.”

류보피는 건강하게 잘 자랐다.

도스토옙스키는 유럽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동안 『백치』(1868),『영원한 남편』(1869) 등을 집필했다. 『백치』는 1868년 <러시아 통보>에 실렸다.『백치』속에는 도스토옙스키가 과거 사형장에서 죽음 직전 살아 돌아 온 체험담이 주인공이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 형식으로 들어있다. 『영원한 남편』에는 그가 시베리아 시절 겪은 애정과 갈등에 대한 경험이 녹아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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