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 세미팔라친스크(현재는 카자흐스탄의 세메이)에서 결혼을 위해 얻은 월세집이 당시 소 세마리 값이 상당하는 비교적 비싼집이었다는 것을 앞에서 이야기했다. 겨우 몇달전인 1856년 10월 장교대우 하사관인 준위가 된 도스토옙스키가 그같이 다소 무리를 하게된 상활을 이해가기 위하여는 도스토옙스키가 어떤 죄로 유형수가 되어 시베리아까지 가게 됐고 어떻게 여기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그 전말을 간략히 다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도스토옙스키, 사형장에서 생명을 건진 후 시베리아로 가다 시베리아 옴스크에서 무거운 족쇄를 찬 채 4년간의 혹독한 유형생활을 마친 도스토옙스키(1821~1881)는 1854년 3월, 곧바로 7백 50km 떨어진 세미팔라친스크의 제7시베리아 보병대대에 사병으로 배속되었다. 형벌의 연장이다. 그는 과거 퇴역 육군 소위였다. 1849년 4월, 평소 참석하던 독서모임에서 비평가 벨린스키가 쓴 차르(황제) 체제를 강력히 비판하는 내용의 편지를 낭독한 죄로 체포되었다. 이 모임에 참석했던 수십명이 체포되어 그중 21명이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당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이다.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사형수들은 1849년 12월 22일 총살형이 집행될 세묘노프스키 연병장까지 끌려갔다가 처형 직전 차르의 은사가 발표되면서 형 집행이 중단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도스토옙스키는 4년 시베리아 유형과 4년 군복무로 감형되었다. 후일 알려졌지만, 감형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차르는 이들에게 인생의 엄한 교훈을 준다는 의미로 잔인한 사형극 진행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했던 최후의 순간에 극적으로 생명을 되찾게 된 도스토옙스키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감방으로 되돌아 와서는 노래를 부르며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그때 그는 ‘삶은 은총’이라고 느끼며 일시나마 행복감에 젖었던 것이다. 세미팔라친스크에서의 군 생활을 하던 중에 그는 7~8세 된 아들을 가진 마리야 이사예바라는 사랑스런 금발을 가진 유부녀를 알게 된다. 도착 첫 해인 1854년 가을 무렵부터다. 그는 온 정신을 이 여인에게 빼앗겼다. 둘은 몰래 만나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러던 어느날 하급 세무관리였던 마리야의 남편이 6백km떨어진 쿠즈네츠크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별의 충격에 좌불안석이었다. 엉엉 울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녀가 가족과 떠나던 1855년 5월의 달 밝은 밤, 그는 친하게 지내던 지방검사 브랑겔 남작과 함께 마차로 마을 밖 몇 킬로미터를 따라가며 그들을 배웅했다. 술에 취한 여인의 남편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도스토옙스키와 마리야는 전나무 아래서 마차에서 내려 안타까운 작별을 고했다. 연인을 실은 마차가 멀리 사라져 갈 때 그는 장승처럼 서서 굵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그런데 알콜중독자였던 마리야의 남편 이사예프가 전근 간지 석달만인 이해 8월 사망한다. 어떤 자료에는 신장병이라고 하고, 어떤 자료에는 폐결핵이라고 적혀있다. 그는 가족에게 장례 치룰 돈도 남겨 놓지 못한 채 죽었다. 이별 후에도 여인과 편지 왕래를 하던 도스토엡스키는 이사예프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이 여인을 돕기 위해 여행중이던 브랑겔 남작에게 마리야에게 돈을 좀 보내주라고 부탁 한다. 언제나 도스토옙스키에게 호의적이었던 블랑겔은 그같은 부탁을 들어주었다. 여인이 미망인이 되었으므로 도스토옙스키는 한편으로는 그녀와 결혼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학교 교사인 베르구노프라는 젊은 경쟁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도스토옙스키는 이사예프가 죽은 후 마리야와의 결혼에 이르기까지 1년 반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으나... 인물이 좋았던 마리야에게는 과부가 되자 혼담도 많이 들어왔던 모양이다. 마리야는 도스토옙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혼담 이야기도 해 도스토옙스키의 가슴을 졸이게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마리야가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자, 형 미하일과 1856년 1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 브랑겔 남작에게, 마리야에게 자신에 대한 황제의 사면이 머지 않아 있을 것이란 점과,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면 그녀를 부양할 능력이 있다는 점을 보증해 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마리야에게 자신이 경쟁력이 있는 남편감이라는 것을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E. H. 카는 그가 쓴 『도스토옙스키 평전』에서 당시 도스토옙스키는 마리야에 미쳐있었다고 썼다. 지나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는 세미팔라친스크 동북쪽의 바르나울까지 다녀 올 수 있는 허가를 얻어, 몰레 쿠즈네츠크까지 그녀을 만나러 갔다. 그같은 사실이 발각되면 처벌을 받게 될 것이지만 그는 그럴 각오까지 하고 쿠즈네츠크에서 마리야를 만나고 돌아왔다. 이틀을 머물고 왔지만 다행히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도스토옙스키는 마리야를 알게 된 후 결혼할 때까지 3년 동안 글쓰기도 거의 포기할 정도로 마리야에게 몰두했다. 도스토옙스키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1856년 10월 준위로 승진한 것이다. 처음에 사병으로 세미팔라친스크로 왔던 도스토옙스키는 그래도 운이 좋았다. 1855년 3월 니콜라이 1세가 죽고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한 후 정치범에 대한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그는 1855년 11월 사병에서 하사관으로 승진했고, 한 해 후 장교대우인 준위로 올라가 결혼을 위한 경쟁력을 더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이사람 저사람 저울질 하던 마리야도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도스토옙스키는 1857년 2월 쿠즈네츠크로 가서 정교회 예배당에서 마리야와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신랑이 1월에 마련해 놓은 세미팔라친스크의 신혼집으로 돌아와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부부는 이 집에서 2년 반쯤 살았다. 그 뒤 모스크바 위의 트베리에 몇 달 머물다 1859년 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들어간다. 하지만 그토록 힘들게 한 이 첫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리야가 폐결핵으로 7년 만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혁명 후 소련 시절에는 세미팔라친스크의 그 통나무집에서 네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아파트였다. 1960년대에 도시정비계획에 따라 이 목조건물이 철거될 위기에 놓였었다. 지붕을 뜯어낸 상태에서 지역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역사적 장소인 이 집을 보존해야한다고 당국에 청원해 철거를 중단했다고 한다. 그 뒤 1971년 이 목조건물에 연결하여 콘크리트로 지어진 2층 규모의 도스토옙스키 문학 박물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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