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가 5년 반 살았던 시베리아의 벽지 도스토옙스키 문학박물관은 러시아 내외에 7곳이 있다. 세계적인 문호로 불리기는 하지만 한 사람의 소설가를 기리는 박물관의 숫자로는 유례가 드물 것이다. 러시아에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타라야루사, 다로보예, 옴스크, 쿠즈네츠크 등 여섯 곳에 있고, 카자흐스탄의 러시아 국경과 인접한 세메이에 한 곳이 있다. 세메이의 옛 이름은 세미팔라친스크. 시베리아의 벽촌 마을이었다. 카자흐스탄이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후 세메이로 이름이 바뀌었다. 세메이에 도스토옙스키 문학박물관이 있는 이유는 과거 도스토옙스키가 옴스크에서 4년간의 유형생활을 마친 후 이곳에 사병으로 배치되어 강제군복무로 5년 반을 지낸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서 결혼도 했다. 지금의 인구는 27만 가량이지만, 도스토옙스키가 살던 당시의 인구는 약 5천 명 정도였다. 세메이(세미팔라친스크)를 향하여 나는 세메이에 가기 위해 2018년 5월 3일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이며 이 나라의 가장 큰 도시인 알마티에 도착해 이튿날 북쪽 도시 외스케멘으로 떠나는 국내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세메이에도 공항이 있었으나 두 달 전 폐쇄되어 항공편이 있는 세메이 인근 도시 외스케멘까지 가서 차량으로 이동하는 경로를 택한 것이다. 알마티 공항에서 비행기에 탑승해 밖을 보니 풍경이 근사했다. 5월 초순임에도 눈덮인 천산산맥의 하얀 설봉들이 공항 저편에 병풍처럼 줄지어 서있는 아름다운 광경이 감탄을 절로 자아내게 했다. 비행기는 오전 9시 조금 지나 이륙했다. 외스케멘까지는 1100km, 비행시간은 1시간 20분 가량 걸린다고 되어있다. 비행기의 속도는 대략 시속 900km 가량이다. 내가 탄 비행기는 의자가 좌우 3석씩으로 큰 비행기는 아니지만, 이보다 작은 비행기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고 했다. 비행기는 북쪽으로 향했다. 오른편 창으로 천산산맥의 설봉들이 내려다 보였다. 왼편에는 푸른 평원이 펼쳐져있다. 나는 이 여행에 알마티에 사는 동포 진재정씨와 동행했다. 외스케멘에 도착해 짐을 찾아 밖으로 나오니 세메이까지 가기 위해 대절한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외스케멘에서 세메이는 220km. 자동차로 3시간 거리다. 운전기사는 러시아계 같았는데 무척 나이가 많아 보였다.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여 70대 중반도 더 되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1963년 생 즉 55세라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늙어 보이는 것은 시베리아의 거친 날씨 탓인지 모르겠다. 세메이로 가는 길은 포장길로 넓디넓은 평원 위에 놓여 있었다. 이 지역은 서 시베리아 대평원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가는 도중 집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풀을 뜯고 있는 소나 말은 가끔 눈에 띄었다. 20여분의 식사 시간을 포함해 약 세시간 반 동안 가는 동안 마을은 두 곳쯤 본 것 같다. 음식을 먹고 차도 마실 수 있는 식당이 있는 곳은 도중에 한군데 뿐이었다. 출발한지 1시간 반쯤 되는 중간 지점에 있었다. 식당으로 들어 가 고기가 들어간 우리의 수제비 비슷한 베스바르마라는 음식으로 간단히 점심을 했다. 식당에서 다시 출발한지 얼마되지 않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세메이로 다가가면서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길 옆 나지막한 언덕에 세메이라는 도시 표지가 보였다. 거의 다 온 모양이다. 조금 더 가니 옴스크까지 757km라는 이정표도 보였다. 도스토옙스키가 유형생활을 한 흔적을 찾아 옴스크에 갔던 적이 있어서인지 표지만으로도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도시 초입의 또다른 이정표에는 알마티까지 1109km라고 적혀있다. 도스토옙스키는 군 생활을 지겨워했다. 장교(공병 소위)까지 했던 사람이 형벌로 사병 근무까지 해야하는 처지이니 늘상 훈련과 검열로 이어지는 군 생활이 오죽 답답하고 힘들었겠는가? 그나마 혹독한 유형생활을 한 다음이었으므로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도스토엡스키는 20대 초에 공병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군복무를 마친 후 작가생활을 시작했었다. 도스토옙스키 작품 속의 이르티시강 도시로 들어갈수록 쇠락한 구 소련의 도시라는 인상이 들었다. 비가 내리는 날씨 탓도 있겠지만 가동을 멈춘 공장의 뻘겋게 녹슨 철 구조물, 오래된 잿빛 건물들, 울퉁불퉁 패어진 도로, 1시간 가량 내린 비로 인해 도로 여기저기에 생긴 크고 작은 물 웅덩이 등, 어려운 이 도시의 재정형편을 짐작케 했다. 세메이에서 150km 가량 떨어진 곳에 구 소련의 비밀 핵 실험장이 있었다. 구 소련 해체 때까지 주민들은 새까맣게 몰랐다고 한다. 핵 실험장은 1949년 건설되어 1991년 카자흐스탄 독립 전까지 유지되었는데, 지하 핵실험을 포함해 총 750회의 핵실험이 있었다고 한다. 핵 실험장 인근의 마을에서는 지금도 기형아 출산율이나 백혈병 등의 발병률이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높다고 한다. 방사능 휴유증으로 보고 있다. 그러한 주변 환경이 세메이의 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로 들어간 후 조금 지나니 커다란 다리가 나타났다. 이르티시강 위에 세워진 다리다. 강폭이 제법 넓었고 물살도 빨랐다. 이르티시강은 도스토옙스키가 쓴 유형생활에 대한 수기형식의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에 자주 등장한다. 옴스크의 이르티시 강변은 그가 자주 노동을 하러 나가는 장소였다. 족쇄를 찬 채였다. 그때마다 그는 강 건너 초원에 사는 유목민들이 누리는 자유를 동경하곤 했다. 이르티시강은 전장 4200km에 이르는 긴 강이다. 몽골 알타이에서 발원하여 중국과 카자흐스탄 북부, 러시아 서시베리아의 옴스크, 토볼스크를 지나 오비강과 합류하여 북극해로 들어간다. 도스토옙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형지인 옴스크로 올 때 토볼스크에서 며칠을 지냈고, 이곳에 있을 때 데카브리스트 부인 폰비지나로부터 표지에 10루블짜리 지폐가 숨겨진 성경을 받았다. 그리고 옴스크와 세미팔라친스크에서 약 10년간 유형과 군생활을 이어갔다. 이르티시강과는 참으로 질긴 인연이 있었다. 이르티시 강 위에는 인접하여 두 개의 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하나는 옛 다리요, 다른 하나는 새로 놓은 다리라고 했다. 다리를 건너 시내로 들어갔으나 비오는 날씨 탓인지 도시의 활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두시 반 쯤 예약한 세미팔라친스크 호텔에 도착했다. 이 호텔은 한 때 이 도시의 대표적인 호텔이었다고 하는데, 엘리베이터는 성인 4명 정도가 겨우 탈 수 있는 작은 구형 모델이었다. 객실도 크지 않았다. 모든게 구 소련 시절의 설비 그대로 인 듯 했다. 짐을 객실에 내려놓고 곧바로 도스토옙스키 문학박물관으로 갔다. 세시쯤 도착할 것이라고 미리 알려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옴스크의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등에 가 봤기 때문에 그 중 가장 작은 도시인 세메이의 박물관에 대해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세메이 박물관은 규모도 다른 곳에 비해 작지 않았고 내용물도 비교적 충실했다. 특색있는 문학박물관 이리나 솔로비요바 부관장(여)이 나를 안내했다. 전시물은 다른 곳 처럼 사진과 서적이 위주였지만, 소설에 들어있던 삽화, 유형수들의 족쇄 등을 전시해 놓은 외에 출구쪽 벽면에 대형 벽화를 피, 땀, 눈물, 화해 등 테마별로 그려놓은 것이 특이했다. 고난에 찼던 도스토옙스키의 세계를 추상적으로 그린 것이라고 했다. 1976년에 당시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작가 게오르기 꼬즈리찐의 작품이다. 그리고 더욱 특징적인 것은 도스토옙스키와 이곳에서 교류했던 젊은 카자흐인 학자 초간 발리하노프(1835~1865)의 흉상과 동상을 박물관 안과 밖에 도스토옙스키의 그것과 나란히 세워 놓은 것이다. 발리하노프는 징기스칸의 후손인 카자흐스탄의 민족 영웅 아블라이 칸의 4대 손으로 서방세계에 카자흐스탄 지역을 가장 먼저 알린 역사학자요 인문·지리학자였다. 그는 1854년 2월, 옴스크를 방문했을 때 수용소에서 갓 석방된 도스토옙스키를 처음 알게 된 후 세미팔라친스크에서도 도스토옙스키를 만났다. 두 사람은 열네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학과 예술, 역사 등에 대해 이야기 상대가 되어 편지도 교환하는 등 가깝게 지냈다. 발리하노프는 아쉽게도 3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 알마티에는 발리하노프의 이름을 딴 도로가 있다. 그는 교과서에도 이름이 등장하는 카자흐스탄의 유명한 역사적 인물이다. 알마티에 러시아 소설가 고골 거리도 있다는 것을 덧붙여둔다. 세메이의 도스토옙스키 문학 박물관 앞 도로의 이름은 도스토옙스키 도로였다. ------------------------ [알림 1] 러시아 문학기행 강좌 개최 제목: 도스토옙스키, 시베리아에서의 10년 강사: 이정식 <시베리아 문학기행> 저자 내용: 도스토옙스키 문학의 토대가 된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과 강제군복무 등 시베리아에서의 혹독했던 10년 세월이 그의 작품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다. 일시: 2018년 5월 29일 (화) 오후 4시 장소: 용산 서울문화사 별관(시사저널 건물) 강당 문의: <우먼센스> 편집팀 (02-799-9127) 이날 3시부터는 같은 장소에서 <우먼센스> 주최 ‘러시아 미술’(김은희 청주대 교수) 강좌도 있다. [알림 2] 8월에 떠나는 러시아 문학기행 : <우먼센스>가 후원하고 BK투어가 주관하는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푸쉬킨 등 러시아 문호들의 자취를 찾아보는 ‘러시아 문학기행’이 8월 24일부터 31일까지 7박8일의 일정으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일원에서 실시된다. 문의 및 신청: BK투어(주) 02-1661-3585.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